베드로 전서 3: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공동번역) 그것은 오늘날 여러분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침례를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침례는 몸에서 더러운 때를 벗기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양심으로 살겠다고 하느님께 서약을 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64-6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5/31 설교 세례와 믿음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이런 글을 봤습니다. “사람들이 주일 아침 11시에 교회에서 배우는 내용이 월요일 오전 11시에 하는 일과 거의 상관이 없다면 무언가 아주 잘못되어 있다.”

마크 그린이라는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하는데요, 일전에 교회 안에서 성찬식을 할 때에 이걸 먹어도 되냐고 물어보는 아이에게 세례를 받았으면 먹어도 되고 안 받았으면 먹으면 안 된다는 말을 하면서 왜 세례가 그런 기준이 되냐는 질문을 하는 것과 대답을 얼버무리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도 교회에서 이 세례는 신자가 필수로 거쳐야 할 하나의 코스가 되어있으며, 한편으로는 하나의 입교식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분명히 이렇게 세례가 관례가 된 것에는 어떠한 중요성이 존재할 것임이 분명한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저, 그냥 당연히 받아야 하는 거지, 절차지 하면서 넘어가고는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세례란 무엇이며 왜 중요한가, 세례 받은 사람의 삶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례전을 상당히 중요시 여깁니다. 한 때에는 이것으로 인해 이단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상당히 성례전이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환원신학 위에 세워진 상당히 보수적인 교단으로 이단성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성례전이 중요할까요? 그것은 먼저 히브리즘의 시간관을 알고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들 그리스도교가 직선적 시간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헬레니즘상의 시간관으로 현대의 시간관과 같이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간다는 스칼라 혹은 백터로 보는 관념입니다.

 

이와 달리 실제 히브리즘상의 시간관은 쉽게 생각해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시간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원형적 시간관이라고 하면 흔히 생각하는 동양적 사상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여기에는 분명 창조가 있고 종말이 있다는 점에서 또 이것과는 다르게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perfect Imperfect 만이 존재하는 시간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간관은 이전도 없으며 미래도 없는 오직 경험한 것 경험하지 않은 것으로 나뉘는 시간관입니다.

예를 들자면 구약의 예언과 성취를 살펴보자면 조상들이 부르짖어 이러하였으니 나 또한 부르짖나이다. 라고 하는 것과 같이 어떤 사건에 있어 내가 어떻게 할 때에 조상과 같이 하면 내가 조상과 같아지는 관념입니다.

여기서 눈여겨 볼 점은 바로 내가 어떤 것을 함으로써 조상과 같아진다.” 정확히 말하면 조상과 같은 경험을 할 것이다. 라고 믿는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구속사 또한 구약의 예언과 함께 이러한 시간관의 연장선상에 놓여있습니다.

, 오늘 우리가 한 만찬 또한 우리가 주의 만찬을 나눌 때에는 단순히 현제 만찬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성경상의 주의 식탁에 초대되어 함께 만찬을 나눈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시간관을 기반을 두어 살펴볼 때에 이 세례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오늘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새 사람이 됨, 깨끗케 됨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주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그 세례를 베푸시는 역사에 동참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볼 때에 세례는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례와 우리의 믿음과는 어떤 관계가 있으며 어떤 역할을 할까요?

 

첫 번째로 세례는 믿음의 수단이며 동시에 믿음의 시작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구원과 긴밀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먼저 믿음이 중요한 것은 부정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에베소서에 나와 있듯 우리 구원의 근거는 바로 믿음에 있으며 구원은 믿음으로 인해 오는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해당 구절을 제가 읽어드리자면 이러합니다.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즉 믿음을 수단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며 구원, 칭의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믿음과 세례를 연관 지을 때에 우리는 질문이 하나 생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바로 뒤 구절에서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며 세례 또한 행위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행위라는 것은 자랑하지 못하게하려함으로써 당시 바리세인들이 지키던 모세율법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행위는 구원 뒤에 오는 것으로, 우리의 행위를 통한 구원이 아닌 구원을 통한 선한 행위가 따라오는 것이기 때문에 행위가 구원의 근거가 되지 못함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오늘의 본문 로마서 6장에서 세례와 칭의를 연관시키고 있으며 베드로전서에서는 물은 곧 너희를 구원하는 표라고까지 이야기하고 있기에 우리는 세례가 구원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바울에 따르면 우리는 세례를 통해 예수와 함께 장사되었습니다. 이것은 수단을 나타내는 것으로 세례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하는 수단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될 때 우리는 죄에 대해 죽게 되며, 죄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악을 향한 지향성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가운대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특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베드로 전서를 근거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비로소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옴, 즉 하나님의 은혜가운데에 거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로마서 본문에 따르면 바울은 세례를 통해 우리는 씻기고, 거룩히 되며, 의롭다하심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세례 또한 믿음처럼 은혜의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례는 무엇이라고 봐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믿음의 수단으로써 믿음을 시작하게 만드는 성례라는 것이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 세례를 수단으로 믿음을 시작하고 이 믿음을 수단으로, 믿음이 근거가 되어 칭의를 받으며, 또한 삶의 변화와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론에 당연스럽게도 우리는 이러한 질문이 생기게 됩니다. 세례만 받으면 믿음이 생기고 저절로 신앙이 이뤄지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단순히 세례만 받는다고 믿음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닌 것으로 이 세례 또한 믿음으로 세례를 받을 때에 진짜 믿음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만 들을 때에는 도통 무슨 말인가 싶을 수 있습니다. 아니 세례를 받음으로 믿음을 가질 수 있는데 온전한 세례를 위해서는 또 믿음이 있어야 한다니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와 같은 말로 보일 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한 설명은 야고보서에서 나타나는데, 야고보서에 따르면 행위는 믿을 완성시키거나 완벽하게 한다고 합니다. 믿음 그 자체가 세례로 나타날 때에 이것으로써 믿음의 온전함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을 비유로 설명해 주였듯 이것 또한 비유로써 연애에 비유해 보자면 좀더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보통 일반적인 연애의 첫 번째 단계로 어떤 사람에게 호감이 있습니다. 이 상태가 바로 믿음을 시작하려하는 단계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호감으로 그 사람에게 고백을 합니다. 이것을 바로 세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고백을 통해 우리는 거절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호감을 고백을 했고 그것을 상대방이 받아주었으니 진짜로 사랑을 시작할 때입니다.

단순한 호감에서 시작하여 사귀게 되면서 그것이 연정으로 발전하며 나중에는 더 깊은 관계를 가지게 되겠지요. 이 사랑을 바로 믿음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즉 사랑을 통해 연애, 즉 관계와 소통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과 연애는 하나님과 우리의 연결됨 즉 구원을 의미하고, 이것을 통해 우리는 삶의 변화와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우리 구원의 근거는 믿음이지만 이 믿음의 수단이자 이 믿음을 시작시켜주는 것이 바로 세례라는 점에서 세례는 매우 중요한 성례이며 반드시 거쳐야할 관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세례를 통해 우리는 성경상의 인물들이 겪었던 구원과 신앙을 할 수 있게 됨으로 우리가 바라고 기다려야 할 예언과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와 있듯 이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비로소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옴, 즉 하나님의 은혜가운데에 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례를 받은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 또한 우리의 친절한 바울 선생은 염려가 많으셨는지 바로 뒤 구절에서 덧붙여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6: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6: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은혜가운데 거하게 되었으니 우리 자신을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은 바로 성화를 이야기합니다. 일전의 제 설교를 들으신 분들은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사람은 악을 향하는 일종의 지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거하지 않으면 진정으로 자유할 수가 없는 우리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한편으로는 공중권세라고까지 성경은 표현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본성 속에서 세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거함을 얻게 되었고 자유함을 가지게 되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는 주의 종으로써의 신분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선을 향하고자 했어도 선을 향할 수 없었으나 이제는 진정한 선을 향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또한 그의 구속사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한편으로 선을 지향하는 것은 세례 받은 자의 특권이면서도 의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세례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사의 사건임과 동시에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새로운 삶을 계속 간구하며 구도하는 일생에 걸친 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예수님처럼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예수님과 같아질 수는 없을지라도 그의 제자이자 하나님의 구속사 속의 일원으로써, 예수를 닮아가기에 힘쓰고 그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간구하며, 세상의 빛이자 소금으로, 주의 형상을 세상에 보이며 매일의 삶을 예배로 드리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믿음의 표현이자 성숙이며 세례받은자가 지양해야 할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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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26 설교

 

심마에 빠질 때.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2:9)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2: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2: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12: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2: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12: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교회에서 우리는 마음이 어렵다. 라는 말을 어려운 상황을 표현할 때 흔히 쓰고는 합니다. 가끔은 농담으로 던지기도 하고요, 이 말은 추상적이지만 이만큼 구체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는 말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떤 어렵고 힘든 감정에는 다양한 원인과 다양한 감정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기 때문인데요.

근래 들어 저는 정말 어려운 경험을 했습니다. 이것은 계속해서 저의 마음속에서 제가 무엇인가를 하려 할 때마다 저를 괴롭히고는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과거의 일들, 그중에서도 특히 어떤 이에 대한 미움인데요, 예전에 있던 사건이후로 어떤 억울함, 그리고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인데 사람들이 그걸 모르는 것에 대한 어떤 아쉬움 실체를 고발하고 싶은 마음, 복수하고 싶은 마음, 왜 나에게 그랬나? 라는 이해되지 않는 이유에 대한 생각, 그리고 그래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의 거짓말에 대한 괘씸한 감정, 그리고 제 주변인을 애매하게 건드리는 것에 대해 나는 화 등등,

이미 지나간 일인데도 불구하고 정말 이해할 수 없이 큰 증오로 아무것도 손에 잡지를 못하고, 나중에는 어떻게 처절하게 복수할까, 잔인한 생각까지도 서슴지 않게 하는 제 자신을 보고 무섭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마음에 대해 안 좋게 생각이 들다가도 오히려 이게 당연하고 때로는 이것이 오히려 다른 이에게는 선일수도 있다며 자신을 합리화하기도 했고, 공부하기 싫어서 나오는 방어기제라고 생각하고 무시하기도 했지만, 불편한 마음들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계속 저를 괴롭혔습니다. 뿐만 아니라, 또 한 번 혼잡해지기 시작한 마음은 어쩐 일인지 마치 봇물이 터지듯 계속해서 번잡해졌습니다.

단순히 화가 난 것이라면 이렇지가 않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며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섞여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계속 떠오르는 온갖 생각들로 고통스럽기까지 하니 이런 것을 보고 심마에 빠졌다고 표현을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이나 감정을 주체하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이런 저에게 생각의 전환을 시작하도록 한 계기는 바로 갑작스레 눈에 들어온 로마서 1221. 악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보고 처음에는 방향은 있으나 왜 이런지, 어떻게 이것을 해결해야 할 것인지 문제의 감이 잘 잡히지가 않았는데, 생각외의 곳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바로 사람의 마음에 대해 많이 서술하고 있는 수행종교, 불교였습니다.

 

심마라는 말의 뜻은 한자로 마음 심, 마귀 마 자를 써서 그대로 풀이하면 사람을 사도로 이끄는 마음의 마귀라고 합니다. 여기서의 사도 또한 간사할 사와 길 도짜로, 간사하고, 사악하고, 바르지 아니한 그런 길을 뜻합니다.

이 말은 불교에서 기인한 말으로 온마, 번뇌마, 사마, 천마 이 네 개의 사마중 번뇌마를 심마라고 합니다.

또한 이 번뇌마는 3독이라는 탐, , 지로 나뉘는데, 탐은 욕심, 진은 분노, 치는 왜곡되게 보는 어두운 마음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 삼독은 나에서 비롯되는 것으로써 나 스스로에게 미혹한 것이 우치이고 이 우치 때문에 세상을 살아가며 나에게 맞으면 탐욕을 일으키고 나에게 맞지 않으면 진에를 일으키게 되며 이 삼독은 중생의 고통을 만드는 원인으로 해석됩니다.

이렇게 상세히 언급되어있는 것을 보면 흔하면서도 심각한 문제로써 인식이 되었고, 또한 이겨내야 할 것으로 인식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 삼독을 없애기 위한 해결 방안으로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 바른 노력, 바른 인식, 바른 정신의 팔정도, 그리고 계, , 혜의 삼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계는 계율로써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 정은 선정으로써 산란(散亂)한 마음을 한 경계(境界)에 머물게 하여 안정(安定)하도록 하는 것, 혜는 지혜로써 진리를 깨닫는 것을 뜻합니다.

어쩌면 매우 당연하기는 하지만 단순하기에 오히려 생각하기 어려운 것으로써 이러한 문제와 해결책을 제시하는 불교는 분명 역사와 조예가 깊은 종교임이 분명합니다. 또한 한편으로는 불교 또한 어떤 비슷한 지향성을 가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잠언 15:1의 유수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라는 말씀의 경우 70인역을 보면 여기에 분노는 슬기로운 사람조차 미치게 하느니라. 라는 말씀이 추가되어있다고 합니다. 아니 어쩌면 구도에 있어 사람이 할 수 있는 수행에 관한 한은 물론 기독교 역사에도 수도원이 있지만 기독교보다 앞서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불가에서 제시하는 팔정도와 계정혜는 우리의 마음의 혼란에 대해 분명한 해결책이 될 것입니다. 또한, 여기까지는 당연한 이야기이고, 많은 종교와 지식인이 이야기하고 동의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설명한 팔정도와 계정혜에는 한 가지 중요한 것이 빠져있습니다. 바로 목적과 기준입니다. 물론 이 또한 불가에서는 추구하는 바가 있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열반에 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에 불교와는 다른 진리, 경계, 계율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즉 불가와 다른 기독교에 기인한 팔정도와 계정혜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의 팔정도와 계정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늘날 본문이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 바른 노력, 바른 인식, 바른 정신에서 바른 이라는 말은 선한,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옳은 방향으로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며, 계정해의 계율과, 마음을 둘 뜻, 그리고 진리 이것을 성서에서는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우리 마음속을 찾아오는 심마는 원죄로부터 기인한 것으로, 우리로써는 당연히 겪을 수밖에 없으며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나아가려는 지향성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타락했다는 것이며 인간인 이상 계속 찾아오고, 또한 더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것이 심마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구속사를 다루고 있으며, 해방의 종교라 할 수 있는 기독교에서 이것에 대한 해방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 집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우리 자신을 내어드릴 때, 그럴 때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변화를 받습니다. 이렇게 이루어진 변화로써 우리는 악을 향한 지향성을 끊어버리고 진정한 자유의지로써 선을 향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본문의 1,2절에서 바울이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힘쓰게 되고, 그의 뜻에 마음을 두게되며 진리이신 그가 우리와 함께하게 됩니다.

정리하자면 결단하여 내 마음에 진리이신 주를 모시고, 그의 뜻에 귀기울이며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계정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루어 질 때에 저절로 나타나며, 또한 이 계정혜를 안다면 우리가 해야할 일이기도 한 현상이 바로 본문 9절부터 21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말하며 어떻게 행동해야할지를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이것이 기독교의 8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한편으로는 이 팔정도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올바른 계정혜에서 나오는가를 판별하는 기준 또한 될 수 있는데, 과연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것과 일치하는가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과연 계정혜에서 기인한 것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문제를 인식했던 것은 이 본문과 저 자신의 생각, 그리고 하려던 행동들이 전혀 다른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었으며, 그 인식을 통해 생각과 행동의 방향을 고칠 수 있었습니다.

앞서 얘기했던 저의 문제는 전환점이후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처음에는 복수할 생각까지 있던 저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기인한 양심이 먼저 마음을 잡았고, 말씀을 통해 이것이 계정혜에 근간한 것이 아닌 잘못된 생각들인 것을 인지하게 됨으로써 실제로 마음을 고치고 흘러간 방향은 관계의 회복이었습니다.

복수가 아니라 먼저 찾아가서 밥을 한 끼 먹자하고 내가 이런 마음도 있었었다. 사실 그래서 주변에 이야기한 것들도 있었는데, 미안하게 생각한다. 근데 같이 웃으며 밥 먹을 사이는 되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나는 전부 이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또 잊으려고 한다. 라는 이야기와 몇몇 넋두리를 이야기 하고는 흔히 말하는 말로 잘 풀렸습니다.

또한 그러던 과정 속에 우를 범해서 잘못보고 있던 오해와, 또 내 욕심으로 잘못 판단하던 것들 또한 알게되다보니 자연스럽게도 정말 방향과 근간을 알기 힘든 큰 분노 또한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는 말 그대로 머릿속을 계속 어지럽히는 일도 없었고 저 스스로 고통 받는 것도 없으며 앞일을 생각한다면 오늘의 본문에 있는 화목함, 그리고 악에 굴복하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결과라고까지도 이야기할 수 있겠지요.

 

정리하자면 주님의 뜻에 마음을 두며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계율과 참 진리인 예수님의 사랑을 아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계정혜이며 여기서 자연스레 나오는 것이면서 동시에 또한 우리의 생각과 언행이 기독교의 계정혜에 근간한 것인지 판단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바로 8정도가 될 것이며 우리는 이 기독교의 계정혜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써의 주님의 가르침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이 기독교의 계정혜와 8정도를 가지고 마음에 어려움이 찾아올 때에 그것을 잘 분별하고 극복할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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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0 설교

 

지금 이 순간, 햇갈릴 때

 

(45:18) 너희 아버지와 너희 가족을 이끌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애굽의 좋은 땅을 주리니 너희가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

(45:19) 이제 명령을 받았으니 이렇게 하라 너희는 애굽 땅에서 수레를 가져다가 너희 자녀와 아내를 태우고 너희 아버지를 모셔 오라

(45:20) 또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온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임이니라

(45:21)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그대로 할새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들에게 수레를 주고 길 양식을 주며

(45:22) 또 그들에게 다 각기 옷 한 벌씩을 주되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과 옷 다섯 벌을 주고

(45:23) 그가 또 이와 같이 그 아버지에게 보내되 수나귀 열 필에 애굽의 아름다운 물품을 실리고 암나귀 열 필에는 아버지에게 길에서 드릴 곡식과 떡과 양식을 실리고

(45:24) 이에 형들을 돌려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 하였더라

(45:25) 그들이 애굽에서 올라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45:26) 알리어 이르되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 야곱이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 하더니

(45:27) 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에게 말하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45:28) 이스라엘이 이르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하니라

 

최근에 몇몇 계기로 제 삶을 돌아보게 되었는데요, 거기서 커다란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살 때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망령이 무엇이냐, 누구나 과거를 돌아볼 때에 좋은 기회가 있던 순간도 있었고, 잘 할수 있었는데, 본인의 능력이 됨에도, 어떤 부조리로인한 좌절이나 상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현제에 악영향을 끼칠 때, 과거로 인해 미래로 나아가지 못할 때 저는 그것을 과거의 망령이라고 표현하고는 합니다.

10년을 되돌아보면, 저 자신에게 중요한 시기들을 수가 틀렸단 이유로, 예를 들어 실재로는 그럴수록 그때라도 다시 할수 있는걸 했으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올텐데, 사춘기떄도, “좋은 기회를 놓쳤으니까, 아예 공부고 뭐고 안해버릴 거야, 반항할거야, 그때 못했으니까...지금 해서 무슨의미야 그때처럼 좋은 기회가 있는것도 잘하는 것도 아닌데..” 같은 식으로 수가 틀려서 엇나가고, 또는 노력하기 싫어서, 현재에 안주하고 싶어서 해야 할 일을 회피하고 허송세월을 보내고는 했던 순간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지금 와서 그 순간들을 생각해보면, 그때가 늦은게 아니였는데, 틀어진게 아니였는데, 그때 왜 좀더 현명한 길을 택하지 못했나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럴 때 왜 나는 좀더 현명한 선택을, 노력을 하지 못했나 싶기도 합니다.

여기까지 생각을 하고 나니, 최근을 포함한 어떤 과거의 상처, 또는 역경, 시련의 경험에 대해 어떤 자세로 그것을 대해야 하는가, 또 그에따라 어떤 결과가 찾아오는가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요샙이 애굽으로 끌려간 뒤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누명을 쓰기도 하는 과정을 거쳐 끝내는 애굽의 총관에 오른 후, 심한 기근으로 이를 대비하지 못한 요셉의 형제들과 아버지가 상봉하는 과정을 담고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제가 주목한 것은 요샙이 결국은 총관이 되어 끝내는 자신을 버렸던 형제들과 아버지를 구원했다는 사실보다, 이 과정과 이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먼저 20, 공동 번역본을 보면, “가지고 있던 세간 같은 것은 아까워하지 말아라, 이집트 전국에서도 가장 좋은 땅이 그대들이 것이 될 것이다.” 라고 나와있는 구절입니다. 과연 이것이 쉬운 일일까요? 자신들이 여지것 살아온 모든 기반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을 버린다는 것, 분명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여지것 잘 살아온 기반을 버려두고 먼 길을 떠난다는 것이 과연 쉬운 결정일까요?

또한 26절에서는 야곱이 요셉의 살아있음과 그가 총리가 된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냥 죽은 줄 알고 있었는데, 이 아이가 대뜸 대국의 총관이 되어있다니, 분명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참 어리둥절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이 모든 것을 이기고 28절에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하니라라고 나와있습니다.

어쩌면 어려움속에 있는 구명줄인데 쉬운 선택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오늘 본문의 다음 장을 살펴보면, 야곱이 두려워하니, 하나님께서 이집트로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것이 자신의 계획임을 알려주는 구절을 살펴보니 이는 당시 야곱에게 쉽지 않은 결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야곱이 여지것 살아온 것을 떠나는 것이 두려워서 떠나지 못했더라면, 요셉이 살아서 총리가 된 사실을 믿지 않았더라면, 이제와서 그게 무슨소용이냐, 그 아이에게 짐만 되지 말자꾸나 그냥 우리는 없던 사람처럼 살자... 하고 눌러 앉아버렸다면? 요셉의 형제들이 자신들이 버린 요셉이 복수할까 두려워 요셉이 저난 말을 전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아니면 이전의 본문속에 찾아볼수 있는 요셉의 고난속에 요셉이 아 진짜 왜이래... 나 운도 더럽게 없네.. 하고 낙심해버렸다면?, 또는 요셉이 과거의 일 때문에 너무 화가 나서 가족을 벌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분명 하나님의 뜻과도 다를 것이고, 야곱, 이스라엘은 기근으로 말라죽고 출애굽은커녕 입애국도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 안에서 현명하게 행동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과연 요셉이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았더라면, 또는 중간에 낙심해서는 삐뚤어 졌다면, 야곱이 요셉을 안만났더라면, 살던곳을 버리고 떠나지 못했더라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였을까요?

결론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은 좀더 사랑하는 방향이며, 낙심하고 포기하고 삐뚤어지기보다는 과거 자신의 잘못된 생각이나 경험을 버리고 현제 자신이 할 수 있는 현명하고 최선을 다하는 행동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에 요셉은 애굽의 총관이 될 수 있었고, 형제들 또한 그를 만날 수 있었으며 아버지 또한 기쁜 마음으로 요셉을 보러 출발하고, 이로써 이스라엘이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런 순간들이 많이 찾아오고는 합니다. 더 좋은 무엇인가를 위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야 하는 순간도 있고, 노력하는 것이나, 새로운 것이 두려워서, 또는 과거의 경험 때문에 내 생각을 버리는 것이 힘든 순간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에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저 또한도 많은 후회와 아쉬움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정말 원하고 나 자신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해야지, 포기하고 가만히 있거나, 당장 조금 편하다고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버려두고 현실에 안주한 삶을 살거나, 과거의 상처에 매여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또 나 자신이 원하는 삶일까요?

그런 것은 하나님도, 저도 원치 않는 단순히 안주하거나, 또는 제살 깎아먹는 치기에 불과한, 현명하지도 못하고, 사랑도 없는 그저 어리광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현제에 충실하고, 과거에 매이지 않으며 버려야 할 것은 과감히 버려가며 더 나은 가치를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이며 하나님이 원하는 자세라는 것을 오늘의 본문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실천하기란 정말 쉽지 않습니다. 무섭기도 하고, 때로는 낙심하기도 하고, 때로는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것에, 심지어 가지고 있던 관념이나 생각이 틀렸음을 알았을 때 그것을 버리는 일 마저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어떻게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었으며, 요셉은 어떻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과거에서 벗어나 현제와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현명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신뢰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함을 믿는 것, 또한 우리에게 좀더 나은 것을 주고자 하심을 믿는 것, 이런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과거를 벗어나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힘이 되어 더 나은 삶으로 우리를 이끌게 합니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내가 틀린 것이 두려워서, 내가 버려야하는 것이 두려워서, 내가 노력하는 것이 고통스러울까봐 두려워서. 후회가 두려워서,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이 두려움을 의미없게 만들고 따라서 사람으로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게 됩니다. 왜냐하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두려워할 대상이 아님을 알게 되기 떄문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삶속에서 오는 역경이 과연 인간이 견뎌내지 못하는 역경일까요? 과연 하나님께서 역경을 주고자 하신다면 그것을 피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적이 없었으며, 하나님은 그런 분이라고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어떤 어려움이기 보다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경우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것과 맞는 것을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요, 그것은 결론적으로 그것이 덕을 세우느냐 아니나로 구분지을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전에 이오갑 교수님 수업을 들으며 자세히는 기억이 나지를 않지만, 어떤 서로 상반되는 생각, 예를들어 술에 취해 방탕해지는것과 좀 힘들지만 어떤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에 자신이 원한다고 생각하지만 자기자신을 망가트리는 경우와 정말로 자기 자신을 위해 자신이 원하는 경우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칼뱅의 서적중에 있지 않았는가 합니다. 진짜 지향성에 대해.] 이 얘기가 생각이 나서 예전에 쓰면서 살펴봤던 몇몇 칼뱅에 관련된 문헌을 살펴보기도 했는데요, 칼뱅은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문제, 일명 아디아포라 라고 부르는 문제에서는 결국 덕을 쌓는 방향으로 행하라고 합니다. 또한 성경도 전체적인 맥락은 결국 주변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물 28절을 공동번역에서 살펴보면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다. 내 아들 요셉이 살아 있다니, 죽기 전에 가서 그 애를 봐야지." 하고 이스라엘은 중얼거렸다. 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야곱이 움직인 이유는 사랑하는 아들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지금 가지고 있는게 아까워서, 또는 가서의 일이 걱정되서 가만히 있을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자신뿐이 아닌 다른 사람들까지 구제할 수 있는 길이었기에 두려움을 이기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것과,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애굽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결론지어 어떤 변화가 생길때나, 과거가 발목을 잡을때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부합하는지를 성찰해보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두려움보다 담대함으로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매여있지 말고,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성경이 오늘날 우리에게 말하고 지양하는 자세입니다.

 

 

 

Posted by creator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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