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전서 3: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공동번역) 그것은 오늘날 여러분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침례를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침례는 몸에서 더러운 때를 벗기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양심으로 살겠다고 하느님께 서약을 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64-6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5/31 설교 세례와 믿음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이런 글을 봤습니다. “사람들이 주일 아침 11시에 교회에서 배우는 내용이 월요일 오전 11시에 하는 일과 거의 상관이 없다면 무언가 아주 잘못되어 있다.”

마크 그린이라는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하는데요, 일전에 교회 안에서 성찬식을 할 때에 이걸 먹어도 되냐고 물어보는 아이에게 세례를 받았으면 먹어도 되고 안 받았으면 먹으면 안 된다는 말을 하면서 왜 세례가 그런 기준이 되냐는 질문을 하는 것과 대답을 얼버무리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도 교회에서 이 세례는 신자가 필수로 거쳐야 할 하나의 코스가 되어있으며, 한편으로는 하나의 입교식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분명히 이렇게 세례가 관례가 된 것에는 어떠한 중요성이 존재할 것임이 분명한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저, 그냥 당연히 받아야 하는 거지, 절차지 하면서 넘어가고는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세례란 무엇이며 왜 중요한가, 세례 받은 사람의 삶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례전을 상당히 중요시 여깁니다. 한 때에는 이것으로 인해 이단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상당히 성례전이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환원신학 위에 세워진 상당히 보수적인 교단으로 이단성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성례전이 중요할까요? 그것은 먼저 히브리즘의 시간관을 알고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들 그리스도교가 직선적 시간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헬레니즘상의 시간관으로 현대의 시간관과 같이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간다는 스칼라 혹은 백터로 보는 관념입니다.

 

이와 달리 실제 히브리즘상의 시간관은 쉽게 생각해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시간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원형적 시간관이라고 하면 흔히 생각하는 동양적 사상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여기에는 분명 창조가 있고 종말이 있다는 점에서 또 이것과는 다르게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perfect Imperfect 만이 존재하는 시간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간관은 이전도 없으며 미래도 없는 오직 경험한 것 경험하지 않은 것으로 나뉘는 시간관입니다.

예를 들자면 구약의 예언과 성취를 살펴보자면 조상들이 부르짖어 이러하였으니 나 또한 부르짖나이다. 라고 하는 것과 같이 어떤 사건에 있어 내가 어떻게 할 때에 조상과 같이 하면 내가 조상과 같아지는 관념입니다.

여기서 눈여겨 볼 점은 바로 내가 어떤 것을 함으로써 조상과 같아진다.” 정확히 말하면 조상과 같은 경험을 할 것이다. 라고 믿는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구속사 또한 구약의 예언과 함께 이러한 시간관의 연장선상에 놓여있습니다.

, 오늘 우리가 한 만찬 또한 우리가 주의 만찬을 나눌 때에는 단순히 현제 만찬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성경상의 주의 식탁에 초대되어 함께 만찬을 나눈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시간관을 기반을 두어 살펴볼 때에 이 세례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오늘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새 사람이 됨, 깨끗케 됨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주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그 세례를 베푸시는 역사에 동참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볼 때에 세례는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례와 우리의 믿음과는 어떤 관계가 있으며 어떤 역할을 할까요?

 

첫 번째로 세례는 믿음의 수단이며 동시에 믿음의 시작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구원과 긴밀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먼저 믿음이 중요한 것은 부정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에베소서에 나와 있듯 우리 구원의 근거는 바로 믿음에 있으며 구원은 믿음으로 인해 오는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해당 구절을 제가 읽어드리자면 이러합니다.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즉 믿음을 수단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며 구원, 칭의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믿음과 세례를 연관 지을 때에 우리는 질문이 하나 생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바로 뒤 구절에서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며 세례 또한 행위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행위라는 것은 자랑하지 못하게하려함으로써 당시 바리세인들이 지키던 모세율법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행위는 구원 뒤에 오는 것으로, 우리의 행위를 통한 구원이 아닌 구원을 통한 선한 행위가 따라오는 것이기 때문에 행위가 구원의 근거가 되지 못함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오늘의 본문 로마서 6장에서 세례와 칭의를 연관시키고 있으며 베드로전서에서는 물은 곧 너희를 구원하는 표라고까지 이야기하고 있기에 우리는 세례가 구원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바울에 따르면 우리는 세례를 통해 예수와 함께 장사되었습니다. 이것은 수단을 나타내는 것으로 세례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하는 수단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될 때 우리는 죄에 대해 죽게 되며, 죄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악을 향한 지향성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가운대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특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베드로 전서를 근거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비로소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옴, 즉 하나님의 은혜가운데에 거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로마서 본문에 따르면 바울은 세례를 통해 우리는 씻기고, 거룩히 되며, 의롭다하심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세례 또한 믿음처럼 은혜의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례는 무엇이라고 봐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믿음의 수단으로써 믿음을 시작하게 만드는 성례라는 것이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 세례를 수단으로 믿음을 시작하고 이 믿음을 수단으로, 믿음이 근거가 되어 칭의를 받으며, 또한 삶의 변화와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론에 당연스럽게도 우리는 이러한 질문이 생기게 됩니다. 세례만 받으면 믿음이 생기고 저절로 신앙이 이뤄지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단순히 세례만 받는다고 믿음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닌 것으로 이 세례 또한 믿음으로 세례를 받을 때에 진짜 믿음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만 들을 때에는 도통 무슨 말인가 싶을 수 있습니다. 아니 세례를 받음으로 믿음을 가질 수 있는데 온전한 세례를 위해서는 또 믿음이 있어야 한다니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와 같은 말로 보일 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한 설명은 야고보서에서 나타나는데, 야고보서에 따르면 행위는 믿을 완성시키거나 완벽하게 한다고 합니다. 믿음 그 자체가 세례로 나타날 때에 이것으로써 믿음의 온전함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을 비유로 설명해 주였듯 이것 또한 비유로써 연애에 비유해 보자면 좀더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보통 일반적인 연애의 첫 번째 단계로 어떤 사람에게 호감이 있습니다. 이 상태가 바로 믿음을 시작하려하는 단계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호감으로 그 사람에게 고백을 합니다. 이것을 바로 세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고백을 통해 우리는 거절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호감을 고백을 했고 그것을 상대방이 받아주었으니 진짜로 사랑을 시작할 때입니다.

단순한 호감에서 시작하여 사귀게 되면서 그것이 연정으로 발전하며 나중에는 더 깊은 관계를 가지게 되겠지요. 이 사랑을 바로 믿음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즉 사랑을 통해 연애, 즉 관계와 소통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과 연애는 하나님과 우리의 연결됨 즉 구원을 의미하고, 이것을 통해 우리는 삶의 변화와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우리 구원의 근거는 믿음이지만 이 믿음의 수단이자 이 믿음을 시작시켜주는 것이 바로 세례라는 점에서 세례는 매우 중요한 성례이며 반드시 거쳐야할 관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세례를 통해 우리는 성경상의 인물들이 겪었던 구원과 신앙을 할 수 있게 됨으로 우리가 바라고 기다려야 할 예언과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와 있듯 이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비로소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옴, 즉 하나님의 은혜가운데에 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례를 받은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 또한 우리의 친절한 바울 선생은 염려가 많으셨는지 바로 뒤 구절에서 덧붙여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6: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6: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은혜가운데 거하게 되었으니 우리 자신을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은 바로 성화를 이야기합니다. 일전의 제 설교를 들으신 분들은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사람은 악을 향하는 일종의 지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거하지 않으면 진정으로 자유할 수가 없는 우리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한편으로는 공중권세라고까지 성경은 표현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본성 속에서 세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거함을 얻게 되었고 자유함을 가지게 되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는 주의 종으로써의 신분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선을 향하고자 했어도 선을 향할 수 없었으나 이제는 진정한 선을 향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또한 그의 구속사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한편으로 선을 지향하는 것은 세례 받은 자의 특권이면서도 의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세례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사의 사건임과 동시에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새로운 삶을 계속 간구하며 구도하는 일생에 걸친 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예수님처럼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예수님과 같아질 수는 없을지라도 그의 제자이자 하나님의 구속사 속의 일원으로써, 예수를 닮아가기에 힘쓰고 그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간구하며, 세상의 빛이자 소금으로, 주의 형상을 세상에 보이며 매일의 삶을 예배로 드리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믿음의 표현이자 성숙이며 세례받은자가 지양해야 할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Posted by creator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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