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726 설교

 

심마에 빠질 때.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2:9)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2: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2: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12: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2: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12: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교회에서 우리는 마음이 어렵다. 라는 말을 어려운 상황을 표현할 때 흔히 쓰고는 합니다. 가끔은 농담으로 던지기도 하고요, 이 말은 추상적이지만 이만큼 구체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는 말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떤 어렵고 힘든 감정에는 다양한 원인과 다양한 감정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기 때문인데요.

근래 들어 저는 정말 어려운 경험을 했습니다. 이것은 계속해서 저의 마음속에서 제가 무엇인가를 하려 할 때마다 저를 괴롭히고는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과거의 일들, 그중에서도 특히 어떤 이에 대한 미움인데요, 예전에 있던 사건이후로 어떤 억울함, 그리고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인데 사람들이 그걸 모르는 것에 대한 어떤 아쉬움 실체를 고발하고 싶은 마음, 복수하고 싶은 마음, 왜 나에게 그랬나? 라는 이해되지 않는 이유에 대한 생각, 그리고 그래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의 거짓말에 대한 괘씸한 감정, 그리고 제 주변인을 애매하게 건드리는 것에 대해 나는 화 등등,

이미 지나간 일인데도 불구하고 정말 이해할 수 없이 큰 증오로 아무것도 손에 잡지를 못하고, 나중에는 어떻게 처절하게 복수할까, 잔인한 생각까지도 서슴지 않게 하는 제 자신을 보고 무섭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마음에 대해 안 좋게 생각이 들다가도 오히려 이게 당연하고 때로는 이것이 오히려 다른 이에게는 선일수도 있다며 자신을 합리화하기도 했고, 공부하기 싫어서 나오는 방어기제라고 생각하고 무시하기도 했지만, 불편한 마음들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계속 저를 괴롭혔습니다. 뿐만 아니라, 또 한 번 혼잡해지기 시작한 마음은 어쩐 일인지 마치 봇물이 터지듯 계속해서 번잡해졌습니다.

단순히 화가 난 것이라면 이렇지가 않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며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섞여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계속 떠오르는 온갖 생각들로 고통스럽기까지 하니 이런 것을 보고 심마에 빠졌다고 표현을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이나 감정을 주체하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이런 저에게 생각의 전환을 시작하도록 한 계기는 바로 갑작스레 눈에 들어온 로마서 1221. 악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보고 처음에는 방향은 있으나 왜 이런지, 어떻게 이것을 해결해야 할 것인지 문제의 감이 잘 잡히지가 않았는데, 생각외의 곳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바로 사람의 마음에 대해 많이 서술하고 있는 수행종교, 불교였습니다.

 

심마라는 말의 뜻은 한자로 마음 심, 마귀 마 자를 써서 그대로 풀이하면 사람을 사도로 이끄는 마음의 마귀라고 합니다. 여기서의 사도 또한 간사할 사와 길 도짜로, 간사하고, 사악하고, 바르지 아니한 그런 길을 뜻합니다.

이 말은 불교에서 기인한 말으로 온마, 번뇌마, 사마, 천마 이 네 개의 사마중 번뇌마를 심마라고 합니다.

또한 이 번뇌마는 3독이라는 탐, , 지로 나뉘는데, 탐은 욕심, 진은 분노, 치는 왜곡되게 보는 어두운 마음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 삼독은 나에서 비롯되는 것으로써 나 스스로에게 미혹한 것이 우치이고 이 우치 때문에 세상을 살아가며 나에게 맞으면 탐욕을 일으키고 나에게 맞지 않으면 진에를 일으키게 되며 이 삼독은 중생의 고통을 만드는 원인으로 해석됩니다.

이렇게 상세히 언급되어있는 것을 보면 흔하면서도 심각한 문제로써 인식이 되었고, 또한 이겨내야 할 것으로 인식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 삼독을 없애기 위한 해결 방안으로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 바른 노력, 바른 인식, 바른 정신의 팔정도, 그리고 계, , 혜의 삼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계는 계율로써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 정은 선정으로써 산란(散亂)한 마음을 한 경계(境界)에 머물게 하여 안정(安定)하도록 하는 것, 혜는 지혜로써 진리를 깨닫는 것을 뜻합니다.

어쩌면 매우 당연하기는 하지만 단순하기에 오히려 생각하기 어려운 것으로써 이러한 문제와 해결책을 제시하는 불교는 분명 역사와 조예가 깊은 종교임이 분명합니다. 또한 한편으로는 불교 또한 어떤 비슷한 지향성을 가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잠언 15:1의 유수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라는 말씀의 경우 70인역을 보면 여기에 분노는 슬기로운 사람조차 미치게 하느니라. 라는 말씀이 추가되어있다고 합니다. 아니 어쩌면 구도에 있어 사람이 할 수 있는 수행에 관한 한은 물론 기독교 역사에도 수도원이 있지만 기독교보다 앞서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불가에서 제시하는 팔정도와 계정혜는 우리의 마음의 혼란에 대해 분명한 해결책이 될 것입니다. 또한, 여기까지는 당연한 이야기이고, 많은 종교와 지식인이 이야기하고 동의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설명한 팔정도와 계정혜에는 한 가지 중요한 것이 빠져있습니다. 바로 목적과 기준입니다. 물론 이 또한 불가에서는 추구하는 바가 있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열반에 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에 불교와는 다른 진리, 경계, 계율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즉 불가와 다른 기독교에 기인한 팔정도와 계정혜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의 팔정도와 계정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늘날 본문이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 바른 노력, 바른 인식, 바른 정신에서 바른 이라는 말은 선한,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옳은 방향으로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며, 계정해의 계율과, 마음을 둘 뜻, 그리고 진리 이것을 성서에서는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우리 마음속을 찾아오는 심마는 원죄로부터 기인한 것으로, 우리로써는 당연히 겪을 수밖에 없으며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나아가려는 지향성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타락했다는 것이며 인간인 이상 계속 찾아오고, 또한 더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것이 심마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구속사를 다루고 있으며, 해방의 종교라 할 수 있는 기독교에서 이것에 대한 해방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 집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우리 자신을 내어드릴 때, 그럴 때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변화를 받습니다. 이렇게 이루어진 변화로써 우리는 악을 향한 지향성을 끊어버리고 진정한 자유의지로써 선을 향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본문의 1,2절에서 바울이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힘쓰게 되고, 그의 뜻에 마음을 두게되며 진리이신 그가 우리와 함께하게 됩니다.

정리하자면 결단하여 내 마음에 진리이신 주를 모시고, 그의 뜻에 귀기울이며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계정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루어 질 때에 저절로 나타나며, 또한 이 계정혜를 안다면 우리가 해야할 일이기도 한 현상이 바로 본문 9절부터 21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말하며 어떻게 행동해야할지를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이것이 기독교의 8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한편으로는 이 팔정도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올바른 계정혜에서 나오는가를 판별하는 기준 또한 될 수 있는데, 과연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것과 일치하는가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과연 계정혜에서 기인한 것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문제를 인식했던 것은 이 본문과 저 자신의 생각, 그리고 하려던 행동들이 전혀 다른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었으며, 그 인식을 통해 생각과 행동의 방향을 고칠 수 있었습니다.

앞서 얘기했던 저의 문제는 전환점이후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처음에는 복수할 생각까지 있던 저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기인한 양심이 먼저 마음을 잡았고, 말씀을 통해 이것이 계정혜에 근간한 것이 아닌 잘못된 생각들인 것을 인지하게 됨으로써 실제로 마음을 고치고 흘러간 방향은 관계의 회복이었습니다.

복수가 아니라 먼저 찾아가서 밥을 한 끼 먹자하고 내가 이런 마음도 있었었다. 사실 그래서 주변에 이야기한 것들도 있었는데, 미안하게 생각한다. 근데 같이 웃으며 밥 먹을 사이는 되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나는 전부 이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또 잊으려고 한다. 라는 이야기와 몇몇 넋두리를 이야기 하고는 흔히 말하는 말로 잘 풀렸습니다.

또한 그러던 과정 속에 우를 범해서 잘못보고 있던 오해와, 또 내 욕심으로 잘못 판단하던 것들 또한 알게되다보니 자연스럽게도 정말 방향과 근간을 알기 힘든 큰 분노 또한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는 말 그대로 머릿속을 계속 어지럽히는 일도 없었고 저 스스로 고통 받는 것도 없으며 앞일을 생각한다면 오늘의 본문에 있는 화목함, 그리고 악에 굴복하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결과라고까지도 이야기할 수 있겠지요.

 

정리하자면 주님의 뜻에 마음을 두며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계율과 참 진리인 예수님의 사랑을 아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계정혜이며 여기서 자연스레 나오는 것이면서 동시에 또한 우리의 생각과 언행이 기독교의 계정혜에 근간한 것인지 판단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바로 8정도가 될 것이며 우리는 이 기독교의 계정혜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써의 주님의 가르침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이 기독교의 계정혜와 8정도를 가지고 마음에 어려움이 찾아올 때에 그것을 잘 분별하고 극복할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야할 것입니다.

Posted by creator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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