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뱅의 자유론: 신앙과 자유의 관게에 대하여 - 윤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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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의 자유론: 신앙과 자유의 관계에 대한 합리적 이해
  지도교수: 이 오 갑 
 
신학부
윤동성
 
목 차
 
. 서론
 
. 자유란 무엇인가?
 
     Ⅱ- 1. 자유의 2가지 전통
         Ⅱ-1-. 그리스 전통으로써의 자유
         Ⅱ-1-. 히브리 전통으로써의 자유
 
     Ⅱ-2. 두 전통과 그리스도인의 자유
 
. 칼뱅의 그리스도인의 자유 
    Ⅲ-1. 내면적 자유
  
    Ⅲ-2. 외면적 자유 
         Ⅲ-2-. 섭리와 자유 
         Ⅲ-2-. 지성과 자유 
         Ⅲ-2-. 아디아포라
 
     Ⅲ-3. 양심의 자유
 
     Ⅲ-4. 소결론
 
. 결론
 
참고문헌
 
. 서론
 
오늘날 사회 속에서 자유는 매우 우선적 순위를 가지는 가치임을 부정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공익에 반하지 않는 한은 국가에서도 이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또한 이 자유는 본질적으로 사람의 행복과 관련되어 있다. 이 자유를 잃을 때에 사람은 고통 받고 자유 안에 있을 때에 행복으로 한 발짝 더 다가간다.
이러한 상황 속 기독교인이라면 구속의 자유라는 세상이 말하는 것과 조금은 다른 성격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기독교 신앙 속에서 삶속에 직면하는 다양한 상황 속에 자유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이것에 대해 과연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무엇이며 어떻게 누려야 하는가를 확실히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이는 이미 한국교회에서 많은 논란과 신앙의 실족이 자유에 관련된 관념으로 인해 일어난다는 사실이 반증한다. 이것은 교인들의 삶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예컨대, 흔히 일어나는 논란으로는 술을 마셔도 될 것인가, 담배를 피워도 될 것인가와 같다. 한국교회는 이것을 전통대로 해결하려 하지만 이것에 강제성을 부여하는 것에 성경을 근거로 하여서 문제가 되기도 하며, 이 자유의 문제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 특정 상황이 왔을 때 그리스도인으로써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도 결정하게 하는, 쉽게 말해 영적, 세속적 세상에 직면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삶의 근간이 된다.[박건택, “칼뱅 신학의 자유의 구조” 『신학지남』 제74권 (2007), 61]
뿐만 아니라 이 자유의 문제는 생활 영역이 아닌 내면과 신학의 영역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자유라는 논제는 복음의 성격을 드러내 주는 것으로써 이미 성서의 출애굽에서부터 언급되고 있으며, “자유라는 단어는 성경속 54번 등장한다. 또한 종교개혁의 계기 또한 자유가 없는, 저주로써의 율법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볼 때에 자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 보아할 때 사실 개신교 교리의 핵심은 자유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으며, 성경의 출애굽을 찾아보더라도 이미 자유에 대한 사상사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전체적인 성경의 구속사는 그 구속으로써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는가를 이야기 하고 있다. 그렇기에 자유를 올바르게 알지 못하는 신앙은 소용없고 잘못된 신앙이라 말하는 것 또한 어렵지 않은 부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자유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중에서도 칼뱅의 자유론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현재 장로교회가 대부분인 한국교회의 실정상 대다수의 교회는, 그리고 교회의 트렌드는 그의 교리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재 한국교회의 실정을 보면 그의 자유론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주목조차 하고 있지 않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올바르게 조명할 때에 많은 잘못된 이해가 바로잡히고, 교회의 잘못된 문화가 바로잡힐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 뿐만 아니라 칼뱅은 개신교 신학에 기틀을 놓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의 자유론은 그저 자유에 국한된 것이 아닌 전체적인 조직신학을 염두에 두고 쓰인 자유론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칼뱅의 자유론은 기타 다른 신학적 요소 또한 감안하고 전체를 보고 연구되었다 여겨진다, 그렇다면 현대의 상황과의 괴리 또한 많지 않을 것이다. 이에 그의 자유론을 올바르게 이해할 필요성이 시사된다. 따라서 이 논문의 목적은 칼뱅의 자유론이 무엇인지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현대에서의 적용을 모색하는데 있다.
 
 
 
. 자유란 무엇인가?
 
먼저, 자유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자유의 의미를 정리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반적 의미로써의 자유와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다를 수밖에 없다. 라는 점을 구분 짓고 시작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구속을 전재하고, 이 두 가지 자유가 다르지 않다면 세상에 살아감에 있어 이 자유로 인한 문제가 생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유의 이념은 사실 우리 서구 문화에 그 특수한 성격을 제공한바 적어도 그것은 이 문화를 형성시키고 이 역사를 움직였으며, 그 풍요함, 저 비극과 영광을 제공해 준 주역들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차완호, “자유에 대한 바울의 이해” (신학석사학위논문, 협성대학교대학원, 2004), pp6; 불트만 『학문과 실존 3권』, pp.100에서 재인용]
이 말에서 볼 때에 일반적으로 자유는 철학에서 가장 중심적인 질문이자 원초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면 이 자유라는 것은 인간이 의지를 가지고 행동한다는 사실을 반증하며, 그 자체로 이미 삶을 살아가는 모든 언행의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자유가 무엇인지 정의내릴 바에는 그것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이 더 쉬운 것 같다[엄정식, 자유 개념의 구조, 『철학논집』 제 9호(2005) ,pp217; E.A. Lagerak, “Freedom: Idea and Ideal”, in: Hearing and Doing. Philosophical Essays Dedicated to H. Evan Runner, J. Kraay & A. Tol (eds), Toronto, 1979, pp39 에서 재인용]라는 어떤 학자의 말처럼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자유는 개념적 파악, 또는 이론적 정의의 대상보다는 체험과 실현을 필요로 하는 어떤 근원적인 이념을 지칭한다고도 할 수 있다.[엄정식, “자유 개념의 구조”, 『철학논집』 제 9호(2005) ,pp217] 부자유에서 벗어남, 즉 억압에서의 해방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것은 정의를 내리기보다 그 역사를 고찰하는 것으로써의 이해가 더 타당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자유라는 개념은 서로 상반되는 개념에 대한 주장과 모호한 주장이 많으며, 다의적이라고 해석되기 때문에[박건택, “자유의 사상사를 위한 서론적 고찰” : 『신학지남』 제76권(2009), pp51-53] 정의한다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Ⅱ-1" 자유의 두 가지 전통
 
이러한 자유에는 두 가지 전통이 있다. 그리스와 히브리 전통 이다. 이 두 가지 전통은 사유의 두 뿌리이자 동시에 기독교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는 일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는 면에서 자유의 이해를 위해 언급할 필요성이 시사된다.
 
"Ⅱ-1-가". 그리스 전통으로써의 자유
 
그리스 전통의 자유는 두 가지 특성을 지니는데 그리스 문명이 오리엔트의 지배세력에 맞선 일종의 자유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고통스런 경험에 대해 상대적인 의미로써 형성되었다고 보인다.
 
첫째로, 자기 동족과 고향 땅에 머물러 있는 귀속성을 말한다. 즉 자유의 반대는 외로운 나그네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엄정식, “자유 개념의 구조”, 『철학논집』 제 9호(2005) , pp218-223]
 
둘째는, 운명, 필연성, 우연과 같은 벗어날 수 없는 무언가에 도전하는 상태 인간이 확보할 수 있는 활동의 공간 이라고 한다.[Ibid]
, 벗어날 수는 없지만 인간의 활동 무대는 있는 상태, 자율적으로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볼 때에 그들은 안정된 삶을 살면서 동시에 삶에 고통으로 다가오는 요소가 있을 때에 그것에 대한 반동으로써 자유를 정의했던 것 같다.
 
또한, 그들에게 이 두 가지 의미로 볼 때에 자연이란 질서는 매우 큰 것으로써, 자신들이 저항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으며 동시에 그들에게 유일한 것을 주는 것이었고, 자신들의 고향이라 바라봤기에 자연이란 것은 그들에게 유일하게 자유에 대한 것을 정해주는 자유를 위해 머물러야 할 대상으로써, 이것을 어느 정도 제어하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자유의 사상이었다.
 
"Ⅱ-1-나". 히브리 전통으로써의 자유
 
다음으로 히브리 전통의 경우 가장 크게 이 자유를 출애굽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히브리 전통에서의 자유는 이와 다르게 바로 예전 것을 부수고 혁신하는 개혁을 의미한다.[엄정식, “자유 개념의 구조”, 『철학논집』 제 9호(2005) , pp224-225] 즉 억압하는 질서를 깨트리고 새로운 질서를 내다보는 것을 자유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들의 자유의 특장은 세 가지로 요약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유는 출생이나 교육을 통한 일정한 상태가 아닌 역사적 사건이자, 과정이다. 구약의 출애굽 사건은 기존의 억압된 상황에서 새로운 자유의 질서를 창조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을 통해 정의와 평화를 근간으로 하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러한 면에서 자유는 구체적인 역사 공동체에서 체험되고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Ibid]
 
둘째, 이 전통에서의 자유는 부정적자유와 긍정적자유가 두드러진다. 이것은 부정적인 것으로부터의 해방으로의 자유와 그 자유에 머무르지 않고 무엇을 위한 자유로 나아가는 긍정적 자유를 뜻한다. 여기서 부정적 자유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만 긍정적 자유는 사랑과 책임적인 삶을 위한 자유이다. 즉 자유 속에서 신앙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Ibid]
 
셋째, 이 전통에서는 자유를 하나님의 의지적 행위, 즉 하나님의 계명을 통해 경험한 것을 자유로 보고 있다, 그렇기에 이 자유는 자율이 아닌 타율적인 자유라 할 수 있으며, 어떠한 법아래서 그와 더불어 얻어지는 자유이다. 그렇기에 여기에서는 필연성, 우연성은 존재하지 않으면서 한편으로는 근대적 의미의 자유와 대조를 보인다[Ibid]
    
"Ⅱ-1-2". 두 가지 전통과 그리스도인의 자유
 
이 두 가지 전통과 근대적 자유사상은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는데, 그것은 바로 자유의 근원적 의미라 할 수 있는 우주적 질서에 머물러 있을 때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엄정식, “자유 개념의 구조”, 『철학논집』 제 9호(2005) , 227] 이것은 현대에 와서의 일반적 자유와는 조금 의미가 다르지만 고통에서의 해방, 자신이 원하는 것의 성취, 행복에 가까이 다가감 이라는 면에서는 목표가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와도 일치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지에 머물러 있을 때에 자유할 수 있다는 구속사적 자유인 것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8:32),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전 4:17)”
이 구절에서 볼 수 있듯 그리스도교에는 자유가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또한 자유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이 자유라는 것 자체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이고, 결론적으로 행복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 의지의 근간이 된다고 할 수 있다.’[김익만, “어거스틴의 자유의지론 연구: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을 중심으로” (신학석사학위논문, 총신대학교대학원, 2010) pp44-53] 
 이 점에서 미루어 볼 때 이 행복이란 궁극적으로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이자 목표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에 대한 해답을 기독교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현대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유의 문제에서 괴리가 생기게 된다. 왜냐하면 목표가 같을지라도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 방법론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그 사이에 오는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 자유는 한편으로는 선택에 있어 강요받지 않을 권리를 이야기 하는데, 이것은 말 그대로 인간이 각기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선택을 모습을 볼 때에 우리는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 자유가 행복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볼 때에 그것은 본인이 틀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이 다름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결정적으로 말하자면 목적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과 도달할 수 없는 방법 간의 차이는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다름과 선택이라는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것을 어느 정도 포괄적이게 나마 한정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앞서 말했듯, 이 자유라는 것은 선택을 할 수 있게 해주는데, 이 선택에 따라 그 결과는 달라진다, 선택이 있기에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선택자에게 찾아오며, 그 책임에 따라 우리는 불행을 느끼기도 하고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의지는 행복을 원하고 있으며 매 순간 선택을 하는 이유는 좀 더 행복하기를 원하는 지향성 때문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자유라는 것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 주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에 자유라는 것은 행복을 위한 도구이며 온전한 자유는 그 자유가 행복을 향하고 있는 상태라 할 수 있다.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이 아닌 인간은 자유를 남용하기 때문에 절대 그 행복에 도달하지도, 방향을 유지하지도 못한다. 그 이유는 어거스틴에 따르면 인간은 행복의 대상인 하나님을 향유하기 보다는 일시적이고 상실되는 것에 집착하여 사랑을 저급하게 만들었고, 이 원죄의 영향 하에 있는 이상 이 자유를 사용하는 의지, 자유의지는 온전하지 않기 때문이다.[김익만, “어거스틴의 자유의지론 연구: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을 중심으로” (신학석사학위논문, 총신대학교대학원, 2010) pp51-53]그렇기에 이 왜곡된 자유의지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 원천인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이것을 칼뱅이 인용하여 한발 더 나아가 설명하는데, 칼뱅에 따르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죄를 짓게 되어있다. 즉 불행을 불러오는 선택을 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의지가 과도한 미친 욕망으로 죄악에 빠져 정복되었고[이오갑, 칼뱅의 인간 121-124], 필연적으로 악을 행하게 된다는 것이다.[박건택, 『칼뱅의 자유사상』 (서울: 솔로몬, 2013), pp76]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죄로 인한 병으로써[이오갑, 칼뱅의 인간, 141-145] 성령의 은총의 힘에 의해 이 자유의지는 다시 회복되어 하나님의 의를 실현하게 된다.[박건택, 『칼뱅의 자유사상』 (서울: 솔로몬, 2013), pp76] , 하나님의 구속 안에 있지 않는 이상 그 지향성이 저절로 악을 향하고 그 결과로써 불행을 불러온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이 의지라는 것이 저절로 악을 향하게 되어있다 필연적이라는 것은 선택을 할 수 없다.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의지에 의해 실현되는 선택은 실질적으로는 자유롭지 못하다고 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죄에 빠지게 된다.
정리하자면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써, 구속으로써의 자유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이 행복은 선에 대한 대가라고 할 수 있기 때문 [김익만, “어거스틴의 자유의지론 연구: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을 중심으로” (신학석사학위논문, 총신대학교대학원, 2010) pp51-53]온전한 선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의지에 머물러 있을 때, 또한 선택을 함에 있어서 그분을 생각하고 그분의 은혜의 도움을 받을 때에 비로소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 앞으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논할 때에 이 자유라는 단어를 이해함에 있어 그리스도인이 자유를 사용하는 법을 모색한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유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로써의 도구이며, 우리가 연구해야하며 필요한 것은 자유 가 아닌 자유를 사용하는 방법“, 어떤 선택이 옳은 선택인가? ,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하는가? 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자유를 과연 개신교 신학의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받는 칼뱅은 과연 어떻게 언급하였는지 알아보고 우리 삶속에서 부딪히는 문제에 적용할 필요가 있겠다.
 
 
   
 
 
 
. 칼뱅의 그리스도인의 자유
 
칼뱅은 기독교 강요에서 복음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 바로 자유라고 언급하면서 이 자유의 중요성을 신중히 언급한다. 기독교 강요를 살펴보면 먼저 12장에 그리스도인의 자유 라는 장으로 자유가 등장한다. 여기서 자유는 세 가지로 요약되지만, 그의 기독교 강요 전면에 이 자유가 조금씩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자유를 외면적 자유와 내면적 자유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내면적 자유는 칭의론에 기초하고 있으며, 외면적 자유론은 성화론에 기초하고 있다.[홍원표, “칼뱅의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연구 『기독교 강요』를 중심으로” (신학석사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교대학원, 2004) 42-43]
 
"Ⅲ-1"내면적 자유
 
칼뱅의 내면적 자유는 복음의 핵심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칭의와 연결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이것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로부터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의롭다 하심은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이 없으며 처음부터 끝가지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의해 칭의가 주어진다.“[Jean calvin. 『기독교 강요: 中』.원광민 역. (경기: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004), 396]
오직 긍휼에 의한 칭의로 의가 주어지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가 자유를 사용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율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지 말고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보아야 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이 율법의 중요성 또한 강조하여 이야기 한다. 그 이유는 이 율법의 용법에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의롭다 하심은 율법과 상관없지만, 그럼에도 율법은 계속해서 우리를 가르치고 권면하여 선을 행하도록 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무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함으로, 순결과 거룩을 추구하게 하는 것.”[Ibid, 397]
우리 자신의 죄를 알게 하고 용서를 구하게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 의를 가르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 칼뱅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두고 대립성을 말하면서도 연속선상에서 볼 때에는 복음의 우위성을 말하고 있다. 그와 함께 칼뱅은 이 율법에서 자유를 입었기 때문에 율법에 기꺼이 자유로써 진정으로 순종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종에서 아들로써 신세가 변화와 같다. 율법의 멍에에 매여 있는 자들은 마치 날마다 주인에게 해야 할 과제를 부과 받는 종들과 같다 이것을 이행치 못했다면 주인 앞에 나서지 못할 것이나 ……. 아들의 경우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아들들에 대해서는 부모가 좀 더 너그럽고 자유롭게 대한다.……. 그대로 부모 앞에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부모가 원한 만큼은 아닐지라도 자기들의 마음의 헌신을 부모가 받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Jean calvin. 『기독교 강요: 中』.원광민 역. (경기: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004), 401]
이것은 양심의 자유로써 율법을 행할 때에 마음의 헌신으로써 자발적으로, 자유의 사용에 의한 선택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받아주실 것이라는 확신과 진심이 필요한 것으로써 강압이 아닌 자유의 사용을 통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으며, 칼뱅은 이것이 그리스도인들로의 삶으로 드러나는 내면적 자유라고 이야기 한다.
왜냐하면 앞서 말하듯 자유를 사용하는 그 의지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악을 행하게 되어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은 이상 필연적으로 악을 행하게 될 것이다.[이오갑, 『칼뱅의 신과 세계』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0) 307-311] 하지만 은혜를 입었다면 그 의지가 자발적으로 선을 추구하게 되고, 그것이 진정으로 율법을 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이 내면적 자유는 선행, 율법, 도덕으로부터의 해방과 함께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칼뱅은 궁극적으로 행복을 향한, 하나님 앞에서의 의는 은혜에서 오며, 선한 행위를 한다고 해도 이것이 행위로부터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이 칭의와 대립되는 공로개념, 즉 구원의 근거가 되는 행위들을 거부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홍원표, “칼뱅의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연구 『기독교 강요』를 중심으로” (신학석사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교대학원, 2004), 62-64]
행함으로는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 얻을 수 있고, 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 또한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만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내면적 자유가 복음의 핵심이며 이 내면적 자유가 이루어 질 때에 비로소 온전한 자유로써의 선택이 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칼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다. 바로 억지로 율법을 지킴으로써는 이의를 얻을 수 없고 오히려 율법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율법, 전통, 공로와 같은 것들을 내려놓고 오로지 하나님의 긍휼, 은혜에 힘입을 때에 비로소 이 칭의를 받고 내면적 자유로써 그 율법 안에 있는 행위들도 진정으로 을 향한 온전한 자유로써 행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내면적 자유는 자연스럽게 그 자유로 인한 행함”, 외면적 자유 즉, 성화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Ⅲ-2"외면적 자유
이 외면적 자유는 주로 그 자체로써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행위, 흔히 아디아포라 라고 불리는 행위들과 관련한다, 칼뱅은 이 자유에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바로 이 외면적 자유가 내면적 자유를 얻은 자들이 삶 속에서 온전한 자유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대체로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섭리와 자유, 지성과 자유, 그리고 아디아포라이다.
 
"Ⅲ-2-가". 섭리와 자유
 
이 문제에 대해 칼뱅의 입장을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지적할 점이 있다. 그것은 이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행동들이 완전히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도 윤리적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어떤 행동을 선택할 때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있기 때문이다.[Ibid, 65]
우리가 충동을 받아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선택하고 의지가 그 쪽으로 기울어지든, 혹은 반대로 우리에게 해가 될 일을 우리의 지성과 마음이 삼가든, 그때마다 언제나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가 거기에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가 어디까지 개입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미리 보시기에 유익한 쪽으로 일들이 일어나도록 하실 뿐 아니라, 사람들의 의지도 역시 같은 쪽으로 기울어지게 하시는 것이다.”[Ibid, 65에서 재인용]
이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인간에 적용되는 것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섭리에 길을 열고자 하시면, 인간의 의지를 그의 뜻대로 바꾸신다. 따라서 인간의 눈에 자유롭게 비치는 행위 또한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게 된다.[Ibid, 67] 이 점에서 인간의 자유행동은 외적 사건보다 내면의 선을 향한 자유의지와 관련된다고 할 수 있겠다.
 
"Ⅲ-2-나". 지성과 자유
 
칼뱅은 인간의 지성을 말하면서 윤리적 영역을 언급한다. 그에 따르면 지성의 활동은 하늘의 것과도 관계될 수 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땅의 것과 관련된다. 여기서 진정한 정의의 규칙 및 근거와 하늘나라의 신비라고 부르는 것,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한 지식, 우리의 삶을 이 뜻에 부합시키는 규칙은 하늘의 것과 관계된 것이며, 정치이론, , 공예, 철학, 자유 교양이라고 부르는 과목들은 땅의 것과 관계된 것이다.[박건택, “칼뱅의 기독교 강요에 따른 그리스도인의 자유”, 『신학지남』 제62권 (1995), 72-73]
칼뱅에 따르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으로, 사회를 보전하려는 본능적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이 지성은 주로 땅의 것과 관련하여 활동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에서 칼뱅은 진리 추구의 자유를 인정은 하지만 인간 지성의 자유가 진리에 접근치 못하며 진리를 목표로 삼지 않다는 점을 들어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 지성의 자유로운 활동은 하나님의 영광과 순수한 복음을 위해 쓰여야 하고, 또한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허락하신 인문 과학이었기 때문이다. , 허락된 것이나 남용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이것은 칼뱅의 배경에 인문학이 깔린 것 또한 영향이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박건택, “칼뱅의 기독교 강요에 따른 그리스도인의 자유”, 『신학지남』 제62권 (1995) ,74-75]
 
"Ⅲ-2-다". 아디아포라
 
외면적 자유로써 아디아포라는 칼뱅에게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자유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부터의 자유로써 칼뱅은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것들은 남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 허용되지 않은 것이 아니기에 이것에 얽매이는 것 또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Emile Doumergue. 『칼뱅 사상의 성격과 구조』. 이오갑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5), 90]
기쁨, 쾌락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 앞에 합당치 못하다고 생각하면, 그 다음에는 사소한 기쁨조차 누리지 못하게 되고 끝내는 기쁨이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런 식이다 보면 길을 걷다가 지푸라기 하나만 밟아도 큰 범죄로 생각하는 우에 빠지게 될 것이다.[Jean calvin. 『기독교 강요: 中』.원광민 역. (경기: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004), pp402]
여기서 칼뱅은 수도원적 금욕주의를 일종의 미끄러지게 하는 오류이자 끝없는 미궁 이라고 표현하며 거기에 발을 들여놓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고 말한다.[Emile Doumergue. 『칼뱅 사상의 성격과 구조』. 이오갑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5), 93]
하지만 언급했듯,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 면에서 칼뱅은 이것에도 제약을 걸어 놓는다. 무절제해서는 안 되며, 경계해야하고, 욕망을 절제해야하며, 이웃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각기 하나님에게서 받은 방식에 따라 자신의 소명의 한계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박건택, “칼뱅의 기독교 강요에 따른 그리스도인의 자유”, 『신학지남』 제62권 (1995), 77]
하지만 어디까지 얼마나 절제해야 하며, 경계하고 어디까지가 자신의 소명인 것인가? 남용하지 않으면서도 허락된 은총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누리는 것, 이것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에 대해 칼뱅은 기독교 강요에서 양심이라는 존재를 계속해서 함께 이야기한다. 양심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이 자유에 대해 우리를 통재하고, 우리를 가르치며, 우리 행동에 있어 원동력을 부여하는 존재로써 하나님과 사람간의 중간적 존재로 대두된다.
 

"Ⅲ-3"양심의 자유
 
칼뱅의 신학에서 이 양심이란 단어는 매우 중요한데, , 외적 자유에 있어서 이 양심이 무엇을 행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며, 결론적으로 무엇인가를 해도 되는가? 라는 것은 이 내적 자유로부터 기인하기 때문이다.
이 단어의 정의는 그 어원에서 찾을 수 있다. 정신과 지성을 통하여 어떤 사물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때에 그것을 가리켜 아는 것(to now)이라고 하며 여기서 지식(knowledge)혹은 학(science)이라는 용어가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지각을 가져서 그것을 증인이 되어 죄를 숨기지 못하도록 만들고, 오히려 그들을 하나님의 법정 앞에 죄인으로 끌어다 놓을 때에, 그 지각을 일컬어 양심(conscience)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양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양심이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살아있는 성향이며, 경건함과 거룩함으로 살기를 바라는 순전한 열심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이 양심은 선한 양심의 열매가 사람들에게까지 다가가기에 사람들 간의 관계에 적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양심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Jean calvin. 『기독교 강요: 中』.원광민 역. (경기: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004) 413]
칼뱅에 따르면 이것을 거스르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것이 그 자체로는 악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양심을 거스른다면 행하거나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무엇이든 믿음으로 쫓아 하지 않는 것은 죄이기 때문이다.( 14:23) 그래서 칼뱅은 이 자유를 아는 자만이 양심의 평안, 즉 양심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릴 수가 있다고 말한다.[박건택, “칼뱅의 기독교 강요에 따른 그리스도인의 자유”, 『신학지남』 제62권 (1995), 75-77]
양심의 자유를 유지하는 문제는 그 자체가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은 사물을 대할 때 특히 첨예하며, 우리는 그것을 자유롭게 누리거나 부인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다른 무엇인가에 내 양심을 구속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유를 주신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한 짐을 스스로 지워서도 안 될 것이다.[홍원표, “칼뱅의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연구 『기독교 강요』를 중심으로” (신학석사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교대학원, 2004), pp69]
칼뱅에 의하면 이 자유는 양심에 관계된 것이고 하나님 앞에 근거가 있고, 양심에 불안이 없다면 이 자유를 해도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자유를 자신의 정욕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닌 덕을 세우는 방향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자유를 스스로 사용하지 않는 자유를 가짐으로써 사랑을 실천해야한다는 것이다.
믿음이 연약한 형제들에게 상처를 주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으로써 주어진 자유가 아니기에 모든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을 섬겨야 마땅하다. 우리에게 자유가 주어진 것은 오히려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며, 사람들 가운데서도 화평을 이루고 살기 위함이기 때문이다.[Jean calvin. 『기독교 강요: 中』.원광민 역. (경기: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004), 408]
한편으로 이 자유를 사용해야 할 때도 있음을 칼뱅은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억압받을 때다.
디도의 경우 할례 베풀기를 강력히 거부하는데, 2:3-5를 참조하면 이것이 거짓 사도들의 부당한 요구로 인해 믿음이 연약한 형제들의 자유가 위협받자 이 자유를 분명히 보이기 위하였음을 알 수 있다.[Jean calvin. 『기독교 강요: 中』.원광민 역. (경기: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004), 409]
한편으로 이 양심의 자유와 법과의 관계도 언급하는데 그것은 바로 두 가지의 통치로써 하나는 영적인 통치 하나는 법적인 통치이다. 이 두 가지 통치는 목표는 같다고 할 수 있지만, 그 방법과 적용이 전혀 다름으로써 이것은 마치 율법과 칭의 사이의 그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가지가 구분되지만 어느 한 쪽으로 인하여 나머지 한 쪽을 무시해서는 안 되고 한 쪽이 한 쪽의 영역을 침투해서도 안 된다.[이오갑, “법의 신학문제 –칼뱅을 중심으로-” 『기독교언어문화논집』 제2권(1998), 262-266] 세상의 법과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자유롭다 해서 육적으로 해방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Ⅲ-4"소결론
 
정리하자면 칼뱅은 외면적 자유 또한 내면적 자유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이 자유에서는 양심이라는 존재가 우리의 몽학선생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양심은 다른 그 무엇에도 구속되어서는 안 되며, 오로지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으로써 유지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올바른 양심에서 올바른 자유가, 열매로써의 올바른 행위가 나온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 있을 때에 온전한 자유, 온전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칼뱅은 진정한 믿음이 있다면 진정한 덕이 있으며, 여기서 제대로 된 선행[Jean Cadier,『칼뱅, 하나님이 길들인 사람』. 이오갑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5), 205]이 나올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내면적 자유, 외면적 자유 이 모든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 구속 사역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하였듯, 우리의 자유의지는 원죄 이후 악에 정복되어 하나님의 은총이 없는 이상, 그것이 율법을 통한 것이든, 지성을 통한 것이든 아무리 선한 행위를 한다고 하여도 이미 그 지향성은 죄를 향하고 있으며 그 결과는 불행, 죄의 값인 사망을 향한다는 것이다.
이 의지가 온전히 하나님께 구속 될 때에, 즉 진정한 믿음이 있을 때에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이 생기고 여기서 제대로 된 선행, 즉 진정한 자유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 결론
 
일반적으로 우리가 교회 안에서 또는 일상 속에서 흔히 겪는 문제는 바로 관계에서 온다. 아니 모든 문제는 관계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 주변 사람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그 모든 문제는 이 관계성에서 문제가 생겨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때로는 우리를 억압하게 되며, 이 관계가 원만할 때에 비로소 그 관계 속에 자유라는 것을 얻게 된다. 본질적으로 이 관계에 문제가 생길 때에는 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이 사이에 끼어들 때 생기게 된다. 하나님과 사람사이도 이 때문에 멀어지며, 사람과 사람사이도 기본적으로 이 때문에 멀어진다. 이 죄라는 것은 쉽게만 예를 들어도 우리는 기본적으로 누군가를 만날 때에 조금식이라도 자기 자신을 포장하는 거짓의 장막을 관계 안에 두게 된다. 이미 그로써 그 관계에 문제가 생길 여지를 두는 것이다.
우리는 원죄를 가지게 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고, 그에 따라 악을 향한 지향성으로써의 자유라는 것을 가지게 되었다.
이 자유로 우리 맘대로 하고자 할 때에 모든 관계에 문제를 일으킨다. 바로 자신의 입맛에 맞도록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기도 하며, 쉽게 상처를 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맞추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자신의 입맛에 맞는 하나님을 구하고 때로는 그 하나님을 정당화에 쓰기도 한다. 사람간의 관계에서는 자신과 가까운 사람, 쉽게 예를 들어 부부싸움도 이 악을 향한 지향성으로써의 자유에서 시작된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너무나도 쉽게 상처를 주는 것이다.
필자는 이것이 큰 문제라고 본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많은 마찰들이 성경의 율법에 기반하고 있을 때와, 개인의 선입견 또는 사랑이 없는 마음에서 일어난다.
이것에 대한 해결책으로 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명언, “본질의 일치를 비본질에 자유를 모든 것에 사랑으로 라는 것을 해결책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본질의 일치를 비본질에 자유를 모든 것에 사랑으로. 필자는 이 말이 이미 기독교의 본질을 최대한 압축시켜 이야기하고 있다고 본다. 과연 우리가 모든 문제를 대함에 있어서 진정으로 사랑으로 대했다면, 비본질에 치중하지 않았다면 교회 안에서, 그리고 신자로써 세상과의 대면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겼을까? 문제가 생겼다고 한들 과연 그 문제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을까? 라는 물음을 가지게 된다.
칼뱅의 자유론에서 알 수 있듯, 진정한 믿음에서 진정한 사랑이 생기고, 여기서 진정한 선행이 나오며 율법을 통해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 때로 문제가 생길 때에는 가장 기본적인 것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것이라 여겨진다.
우리가 항상 어떤 행동을 하기에 앞서 본질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을 향한 지향성을 잃지 않고, 이외의 다른 율법과 같은 외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자유를 두고, 모든 것에 대해 오로지 덕을 세우기 위함, 사랑으로 대한다면 이 자유에 대한 오해로 생기는 문제, 마찰과 함께, 인간 내면의 고통에서의 자유 또한 가져다 줄 것이라고 본다.
즉 다른 그 무엇도 아닌 먼저 본질의 일치, 오로지 그리스도를 통한 긍휼에 의지하는 진정한 믿음이 필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내면적으로는 사랑, 외면적으로는 정의,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칭의, 그리고 인간의 하나님을 향할 수 있는 필연적 범죄로부터의 자유, 즉 진정한 자유로써의 자유의지를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없으며,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며, 이것의 시작이 바로 그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외에 다른 것은 자유, 그리고 사랑으로 대하면 될 것이다. 우리의 의를 내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참고 문헌
국내서적
박건택, 칼뱅의 자유사상 (서울: 솔로몬, 2013)
이오갑. 칼뱅의 신과 세계(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0)
          칼뱅의 인간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2)
 
번역서적
Emile Doumergue. 칼뱅 사상의 성격과 구조. 이오갑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5)
Jean Cadier,칼뱅, 하나님이 길들인 사람. 이오갑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5)
Jean calvin. 기독교 강요: .원광민 역. (경기: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004)
 
논문
김익만, “어거스틴의 자유의지론 연구: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을 중심으로” (신학석사학위논문, 총신대학교대학원, 2010)
 박건택, “칼뱅 신학의 자유의 구조”. 신학지남 74 (2007) pp.55-72,
      ""   칼뱅의 기독교 강요에 따른 그리스도인의 자유”. 신학지남 62 (1995) 58-100 (43 pages) 
      ""   자유의 사상사를 위한 서론적 고찰” : 신학지남 76(2009)
<!--[endif]-->엄정식, “자유 개념의 구조”. 철학논집 9(2005) pp218-240
이오갑, “법의 신학문제 칼뱅을 중심으로-” 기독교언어문화논집 2(1998), 256-280
이진일, “마틴 루터와 요한 칼뱅의 그리스도인의 자유 개념 비교” = Theology of Christian Liberty by Martin Luther and John Calvin (신학석사학위논문,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대학원, 2002)
차완호, “자유에 대한 바울의 이해” (신학석사학위논문, 협성대학교대학원, 2004)
홍원표, “칼뱅의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연구 기독교 강요를 중심으로” (신학석사 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교대학원,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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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로에스와 이중진리론

 

 

목차

 

l 서론 : 이중진리론 이란?

 

 

l 이중진리론 아베로에스

 

 

l 아베로에스와 알 가잘리의 논쟁
1. 철학과 신학의 대결
2.
알 파라비와 이븐 시나, 그리고 신플라톤 철학
3.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이븐 루시드와 알 가잘리의 논쟁

 
 . 1논쟁
  
. 2논쟁
  
. 3 논쟁

l 논쟁의 평가와 아베로에스의 영향

 

 

l 참고 문헌

 

 

 

 

이중진리론이란?

 

 이중진리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배경을 먼저 알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합리주의다. 합리주의는 종교와 철학이 부딪히는 문제 속에서 일어난 시도로 이성과 신앙, 또는 철학과 신학에 대한 구분은 중세에서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의 가치를 높이든 어거스틴, 안셀무스 같은 초기 중세 사상가들이나,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시도했던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스콜라철학자들이 속해있는 그리스도교 세계에서만 일어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중세 그리스도교 안의 철학과 신학의 구분은 인위적인 것으로 철학과 관련된 주요 사상가들은 모두 신학자들이었고, 그 세계의 철학적 작업들 대부분이 인문학보다 신학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중세 이슬람 세계에서는 신학과 철학의 구분이 인위적인 것이 아닌 그리스 철학을 받아들이면서 나타났으며, 그 구분도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인정된 것이었다.

이슬람의 사변신학은 코란의 해석과 예언자 무함마드의 삶을 둘러싼 전통에서부터 성장한 토착학문인데, 반면에 철학은 9세기에 유입된 그리스 문헌들에 대한 연구로부터 직접 전해진 이방학문이다

 이 와중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과 같은 신학과 적대적 위치를 가질 수 있는 철학이 알려졌고, 신학자들과 철학을 연구하는 이들은 결국 적대적인 입장에 처하게 됨으로 중세 이슬람 세계에서는신학과 철학은 서로 양립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이 제기된다.

 이에 토착신학의 우선성을 강조하며 이성의 역할을 폄하하는 신앙주의에 대항하여 합리주의가 생겨나게 되었고 최초의 합리주의자라 할 수 있는 알파라비종교를 철학의 노예라고 주장하기까지 하게 되는데. 이에 다시 합리주의 흐름에 반기를 들며 알 가잘리 라는 학자는 철학자들의 모순이라는 작품을 저술하는데 그에 의하면 모든 철학적 학문은 인간 이성의 힘에 과도한 맹신과 자만을 가져다주며 신학에 주관적 위험을 줄 수 있다고 말하면서 알파라비의 합리주의에 의해 제시된 내용인

1. 사후 신체의 부활에 대한 부정

2. 특수자들에 대한 신의 인식가능성의 부정

3. 세계가 영원하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을 펼치게 된다.

 (부연설명으로 알 파라비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신플라톤주의를 어느 정도 결합시키고 그 토대위에 자신의 철학체계를 세웠다. 이러한 알 파라비의 철학적 경향은 아비센나와 아베로에스에게 사상적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최고의 지성으로 인식하는 아베로에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에 따르면 철학은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대상으로 삼기에 철학과 이슬람교가 추구하는 진리는 결국 동일하며 종교는 단지 상상할 수 있는 표상과 설득의 방식을 좋아하는 자들이 따르는 방식이다. 더 나아가 철학은 합리적 논증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적합한 진리추구의 방식이므로 종교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플라톤의 입장을 가지고 이슬람을 재해석하려고 노력했다. 이슬람의 모든 영역, 변증법적 신학, 신조, 꾸란 법, 문법, 시 등의 영역에서도 이러한 노력을 했고 이성으로 이슬람의 계시를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주 저서인 『편지의 책』에서 종교는 완전한 철학에 의존한다는 입장을 보이며, 철학은 진리를 인식하는 방법에 있어서 종교보다 더 우위에 있으며 완전하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일자(the one)[1]는 유출의 출발점이며 유출설의 공식에 따라 제1원인인 일자로부터 몇 가지 예지적 존재들이 유출되며, 서시서 천상의 세계, 지상의 세계가 유출되는 것으로 창조개념을 이해했다. 그에게 있어 능동지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사고하게 하는 작용을 의미한다. 그는 이런 논리적 구분을 피조물에게 나타난 본질과 실존간의 실재적 구분의 표지로 간주했다. 그에게 창조물은 그 자체가 가능존재이며 가능존재는 원인에 의해 실존이 주어졌을 때 실존할 수 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철학 입장에 신플라톤주의적인 방법으로 신학적 경향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는 이성의 역할을 중시하며 예지체를 사용, 우주의 원리를 설명했다. 이러한 신 개념은 꾸란의 개념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2])

 이러한 주장은 중세 이슬람 뿐 아니라 기독교 세계에서도 논란거리였고, 대표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운동의 절대적 시작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세계는 시작이 없다고 주장하였고, 이슬람 철학자들은 세계의 영원성을 철학적으로 증명되며 필연적인 것이라 결론짓지만 이슬람교는 시간 속에서의 창조를 진리로 받아들이며 세계의 영원성을 부정한다. 이는 코란이 세계가 창조되었으며 시작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앙과 이성이 부딪침 따라 나타난 합리주의 흐름 중에서 중세 이슬람 철학자중 가장 대표적인 합리주의자가 바로 아베로에스인데, 그는 다시 알 가잘리의 공격에 대해 「철학자들의 모순」 이라는 작품에 대한 철학적 반박으로 「모순의 모순」 철학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종교적 믿음들의 증명 방법에 대한 설명」, 철학자들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율법적인 관점에서 정당화를 모색하는 「결정적 논고」를 쓴다.

 이중 결정적 논고는 우리가 눈여겨 봐야하며 서구 문명사의 이정표라 평가될만한 책이기도 하며 이중진리론의 근간이 되는 저서이다.

아베로에스는 철학과 논리학의 연구는 율법에 의해 허용되는지 금지되는지, 아니면 명령되는가에 대한 질문을 이 책에서 던지는데, 그의 논변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1. 코란은 이슬람교도에게 철학을 하라고 명한다.

2. 신학과 철학은 상호 반대되지 않는다.

3. 대중들의 신앙을 의심하게 하는 미묘한 논증을 함으로 이슬람교에 위험을 제공하는 것은 철학이 아니라 신학이다.

 그에 따르면 철학은 모든 존재들에 대한 연구이며 이때 존재들은 바로 그 존재들을 있도록 만든 창조자 신을 닮아 있음을 지시한다. 한편 율법은 모든 자신들의 지적 능력을 사용함으로 창조자 신을 가리키는 존재들에 대해 반성하라고 명한다. 따라서 철학은 율법에 의해 의무적이라 결론짓는다.

 또한 그는 율법이 명한 것은 인류에게 개방된 가장 탁월한 방식으로 수행되어야 하며, 따라서 사람들이 지성을 사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알려진 것으로부터 미지의 것을 추론하고 도출한다[3] , 또한 철학을 함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우연적인 폐해를 감안해야 하지만 그것은 우연일 뿐이라고 이야기 한다.

 이러한 아베로에스의 합리주의는 당대 이슬람 세계에서 환영받지 못했고, 결국 철학을 박해하는 분위기로 그는 유배를 당하고, 그의 저작들은 모두 불태워지게 된다. 그 와중 코란이 아니라 성경을 진리로 받아들였던 파리 대학 인문학부 교수들 가운데 아베로에스를 철학의 스승으로 존경하고 그의 합리주의 노선을 쫒아가고자 했던 라틴 아베로에스주의자들로 인해 아베로에스라는 이름은 기독교 세계에서도 뜨거운 감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는 당대 라틴 아베로에스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철학적 입장의 근간으로 채택한 아베로에스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해석과 합리주의노선이 당대 기독교 교리와 충돌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라틴 아베로에스 주의자들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여러 신학자들에 의해 공개적 비판을 받고, 1270, 1277년 두 번에 걸친 단죄의 대상이 된다.

 당대 신학자들에 의해 그리스도교 신앙과 모순된다고 평가되는 그들의 철학적 이론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 이중진리론이다.

 이중진리론은 성경에 계시된 진리와 필연적인 원리들로부터 논리적으로 연역된 철학적 진리, 즉 상호 모순적인 두 진리가 양립 가능할 수 있다는 이론으로 평가된다. 예를 들면 세계는 창조되었고 시작이 있다고 성경이 가르치기에 무로부터의 창조를 의심할 수 없는 계시적 진리로 받아들이는 반면, 운동의 절대적인 시작을 철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변을 쫒아서 철학자로서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거부하고 세계의 영원성을 논증한다면 그것을 이중진리론이라 부를 수 있다.

 

이중진리론과 아베로에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13-4세기 기독교세계 뿐 아니라 현대 주석가들도 라틴아베로에스주의자들의 주장이라 평가되던 이중진리론의 원조를 아베로에스라고 단정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러한 이중진리론의 원조는 아베로에스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

이는 결정적 논고 2장에서 나타나 있는데 아베로에스는 철학과 신학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 종교(율법)는 참이며 진리의 의식에로 이끄는 연구를 할 것을 요청하기 때문에, 우리 무슬림 공동체는 논증적 연구가 경전에 적혀있는 것과 충돌하는 것으로 이르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안다 왜냐하면 진리는 진리에 반대하지 않고 진리와 일치하고 진리를 입증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베로에스는 철학적 진리가 신학적 진리와 다르지 않음을 주장하는데, 코란의 진리와 필연적인 원리들로부터 논리적으로 연역된 철학의 진리는 서로 모순되지 않고 일치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인 전제에서 이러한 이중진리론은 아베로에스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신학과 철학의 충돌에 대해 신학과 철학이 동일한 사태의 세계에 대한 주장을 하기 때문에 그중 하나가 거짓된 주장을 한다면, 둘 간의 충돌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충돌하는 신학과 철학의 관점은 철학자들에 의해 우의적으로 읽혀져야 하며, 그들만이 그 내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으며, 진리의 최종 중재자는 바로 철학자임을 말한다. [4]

 정리하자면 아베로에스는 철학과 신학 간에 실제로 일어나는 충돌을 두 학문이 상이한 방식을 사용할지라도 동일한 실재와 연관되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철학과 신학이 동일한 실재를 기술하기 위해 동일한 언어를 사용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따라서 하나의 진리만 있을지라도 그것은 상이한 방식으로 접근될 수 있다. 그 두 가지 방식은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게 적합하다.[5]

 결론적으로 그는 모순되는 두 진리가 동시에 참임을 주장하는 이중진리론의 주창자가 아니다. 신학은 그 자체의 목적에 유용한 도구들을 철학에서 빌려올 수 있다는 그의 입장은 어거스틴이나 아퀴나스의 접근 방식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철학이 신학보다 우월하다는 점 즉 에매한 말들로 이뤄진 것은 철학으로써 정확히 정할 수 있고 철학이 신학을 밝혀내는 도구라는 점은 그들과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아베로에스는 철학적인 이슬람 합리주의자에 가깝고 이중진리론은 이후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이를 용인하지 않는 기독교 세계 내에서 만들어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아베로에스의 이중진리론을 설명하자면 이중진리론이란 아직 정확히 정의되지 않았거나 과거 철학과 신학의 과도기에 잠시 나왔지만 지금은 새롭게 정리된 하나의 학문분야라고 할 수 있겠다.

 라틴아베로에스 학파의 이중진리론은 신학과 철학은 독립된 지식의 원천으로서 신학과 철학이 서로를 손상하지 않고 모순되는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견해인데 당시 이는 철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두 가지가 모순된 것을 말하고 있지만 그 모순된 두 가지가 다 진리라는 것이다, 즉 철학적으로 신이 없지만 신학적으로 있으며, 세계의 시작이 신학적으로 있지만 철학적으로는 시작이 없으며, 신학적으로 종말이 있지만 철학적으로 세계는 영원하다. 즉 기독교를 예로 들자면 신학적으로 예수는 실존했지만 철학적으로는 그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전설일 뿐이며, 조금 더 생각해서 예를 들자면 지구의 나이가 성경적으로 6000년이라 설명하는 사람들과 과학자들 간의 대립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신학자들 또한 견해가 갈리는 것으로 진화론 또한 창조의 방법이자 일부다 라고 정의하는 사람도 있다. 즉 양극간의 서로 존재할 수 없는 모순이 동시에 진리라는 과도기적으로 일어난 하나의 학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다르게 아베로에스의 주장은 결론적으로 진리는 하나로 통합되는 것으로, 이를 현대에 와서 정리하자면 서로 모순될 수는 있으나 그 과정의 끝에 있는 진리는 하나다. 라는 입장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진리는 하나이지만 그것을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점, 예를 들어 말하자면 빛을 광자라고도 부르며 광파라고도 부르는데 물리적으로 증명된 바로는 빛이 파동이자 입자이기도 한 것으로써 설명할 수 있겠으며,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주장은 한쪽이 우연히 잘못된 주장을 한 것이라는 것이다.

 

아베로에스와 알 가잘리의 논쟁

 

 아베로이스가 이중진리론의 주장자가 아니라 합리주의의 수준적 구별자라는 것을 증명하기위해서는 모순의 모순에서 알 가잘리에 대한 아베로에스의 반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와 그 논쟁의 배경을 볼 필요가 있다.

 

 1. 철학과 신학의 대결

 알 가잘리와 이븐 루시드(아베로에스)는 각각 중세 신학과 철학은 대표했던 인물로써, 양자 간의 치열한 논쟁은 흔히 종교와 철학간의 대결로 표현되곤 했다. 이러한 이유로 이븐 루시드는 오늘날까지 그리스 철학의 계승자로 그 이미지가 각인되어있다.

그는 12세기 무렵 동서양을 막론, 최고의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자였다. 그는 평생 26권에 달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주해를 남겼다.

 이 논쟁의 중심에 서있는 [6]알 가잘리는 정통주의 신학을 대표했던 인물로써 철학자들을 비판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전통적으로 무슬림 신학자들이 꾸란에 나타난 알라의 모습을 이해한 방식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알라는 엑스 니힐로적인 창조주이다.

2. 알라는 역사적 시간 속에서 분명히 활동한다.

3. 알라는 역사적 시간 속에서 인류를 인도한다.

4. 피조물은 어떤 식으로든 알라를 직접 인식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알 파라비와 이븐 시나와 같은 철학자들이 정립한 유출론과 우주론은 전통적 이해 방식과 전혀 달랐기에 보수 신학자들은 용납 또는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일부는 철학자를 배척하고, 심지어 박해를 가하기도 했다. 그중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알 가잘 리가 『철학자들의 부조리(Tahafut-Falasifa, 1095)』를 통해 철학자들이 범한 오류를 20개 항목에 걸쳐 비판한 것이다.

 그 중 특히 세계는 영원하다라는 주장, 알라는 보편적인 사실만 인식할 뿐 개별적 사실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한다, 육체적 부활은 불가능하다 등의 3가지 항복은 불신자의 죄에 해당하다고 판결했다. 즉 불신자 취급을 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나는 어리석은 자들의 무지가 극치에 달했음을 발견 했고, 이 때 고대 철학가들을 반박하기 위한 저서를 집필하게 되었다. 이는 신학과 관련하여 그들이 범한 사상과 말의 모순을 밝히고 그 페혜와 약점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상기한 세 가지 문제는 결코 이슬람과 부합하지 않는다. 그것을 믿는 자는 예언자들의 말씀을 불신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언자들의 말씀이란 당지 대중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비유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명백히 불신앙에 해당되는 것으로, 무슬림 가운데 그 것을 믿었던 자는 아무도 없다.

 이븐 루시드는 이러한 알 가잘리의 공격이 부당하다고 여겼고, 거기에서 『종교와 철학의 조화에 관한 소고』, 『논증의 방법론 성찰』, 『부조리의 부조리』와 같은 세 권의 반박서가 나오는데, 여기서 알 가잘리와 마찬가지로 20가지 항목에 걸쳐 자신의 입장을 밝혔으며, 핵심적 3가지 주장이 모순임을 주장했다. 그것이 바로 앞에서 언급했던 알 가잘리의 철학자들에 대한 3가지 비판이다.

 

2. 알 파라비와 이븐 시나, 그리고 신플라톤 철학

 [7]먼저 이 논쟁을 다루기에 앞서 우리는 이븐 시나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이븐 시나는 알 파라피의 주석가도로 유명한 인물로써, 알 가잘리의 3가지 불신자 논쟁의 주장을 하도록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그의 유출론은 신플라톤 철학의 유출론인데, 이 신 플라톤 철학의 유출론은 보수적 무슬림 학자에게 많은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8]7세기 이슬람의 등장 이후 신플라톤주의를 비롯한 영지주의 계열의 종교와 철학은 이슬람 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슬람 세계에서 탄생한 알 파라비와 이븐 시나의 우주론, 수피주의 쉬아파 철학, 조명철학 등은 모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영지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슬람 세계에서 이런 영지주의 계열의 철학과 신학을 정립하고 발전시킨 무슬림은 대부분 페르시아 출신, 또는 영향을 받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페르시아는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가 탄생한 지역이었는데, 이것은 영지주의 계열의 사상 체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또한 페르시아는 기원 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이후부터 그리스 학문을 꾸준히 접해왔고, 기원 후 5세기 사산조 시절에는 시리아지역에서 추방된 기독교도들을 주축으로 번역학교를 세워 그리스 철학을 적극 수용했다. (아마도 페르시아인들 에게 있어서 신플라톤주의와 같은 영지주의 계열의 철학은 자신들의 전통 종교에서 엿보여지는 세계관과 잘 부합되기에 매우 친근감을 느꼈고 선호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랍의 정복 이후 그들은 많은 문화적 환경의 변화로써 이슬람으로 개종해야했고 꾸란을 자신들의 경전으로 받아들이면서 아랍어도 익혀야 했다. 하지만 정통적으로 계승되어온 영지 주의적 사고관은 페르시아 출신 무슬림들에게 여전히 신과 우주를 바라보는 틀로서 작용하고 있었고, 따라서 꾸란을 기존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차원에서 접근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 꾸란 해석을 새로운 영지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써 유일신 알라, 창조, 계시, 예언자들에 대한 개념을 정립했던 것이다. 그 결과 신플라톤주의의 용어와 도식을 차용하여 자신들의 지적 환경에 맞게 변용하고 새로운 종교철학의 정립을 시도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선구자가 바로 알 파라비(al Farabi, 870-950)와 이븐 시나(Ibn Sina, 980-1037)였다.

 알 파라비의 철학은 플라톤의 영향도 받았지만 그의 형이상학과 우주론은 신플라톤주의로부터 많은 개념을 빌려온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정립한 유출론적 우주관은 11세기 무렵 페르시아 출신의 무슬림 철학자 이븐 시나에 의해 가다듬어지고 발전하였다. 이븐 시나는 알 파라비의 유출론을 그대로 답습하며 우주의 세계를 설명하였고, 따라서 알 가잘리의 논쟁의 시발점을 알 파라비와 그것을 발전시킨 이븐 시나의 주장으로 볼 수 있다.[9]

 이븐 시나의 [10]신플라톤 철학은 이슬람과 전혀 다른 창조 개념으로, 알라가 영적 존재만을 유출시킬 뿐, 지상의 역사와 매우 무관한 매우 초월적이고 외재화된 존재이다. 또한 알라는 지상세계와 근원적으로 단절되어 있음을 도식적으로 설명한다.(아래 참고)

 

필연적 존재 (Necessary Being = )

󰀻

1 지성체 (The First Intellect)

2 지성체 (The Second Intellect)

3 지성체 (The Third Intellect)

4 지성체 (The Fourth Intellect)

5 지성체 (The Fifth Intellect)

6 지성체 (The Sixth Intellect)

7 지성체 (The Seventh Intellect)

8 지성체 (The Eighth Intellect)

9 지성체 (The Ninth Intellect)

10 지성체 (The Tenth Intellect)

(능동 지성체 = Active Intellect)

󰀻

생명소멸의 세계 (World of Generation and Corruption = 지상세계

 

 알 가잘 리가 문제 삼은 3가지 핵심 논쟁은 바로 이 창조론 논쟁과 관련되어있다. 3가지 핵심논쟁에서 이븐 시나는 전형적 이슬람의 창조론과 우주론을 부정하는 것이다. 또한 알 가잘 리가 소개하는 철학자들의 주장은 모두 이븐 시나의 『치유의 서』와 『구원의 서』에서 발췌한 것이다.

 

3.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이븐 루시드와 알 가잘리의 논쟁

 그러므로 본론으로 돌아가 여기서 이븐 루시드의 반박에 유념해야 할 점은 알 가잘 리가 공격 대상으로 의도했던 철학자와 이븐 루시드가 방어의 대상으로 삼은 철학자가 다르며, 이븐 루시드는 철저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계승자로서 신플라톤 철학과 연관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에 따라 오히려 이븐 시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곡해한다고 보았고, 그에 따라 이븐 루시드 또한 알 가잘리와 마찬가지로 이븐 시나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그의 반박 의도가 드러나게 되는데, 그는 알 가잘리가 가진 시각, 즉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이븐 시나의 철학이라고 착각하여 확대해석하며[11], 불신자 선언과 같은 율법적 잣대를 휘두르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또한 그의 입장에서 알 가잘리는 결코 이븐 시나의 철학적 지식을 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자신의 학문에 대한 방어와 올바르지 못한 추론방법에 대한 비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12] 이것이 바로 3가지 논쟁에 드러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논쟁 : 철학자들은 세계가 영원하다고 주장한다.

(세계가 영원하다는 주장)

 이것은 세계 창조의 의견 대립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이슬람 신학자들은 전통적으로 ex nihilo , 무로부터의 창조를 주장해왔다. 이에 반해 이븐 시나는 물질세계의 창조주임을 부인한다. 여기서 (이 논문 상에서) 그는 영혼/물질 의 관계를 선/악의 관계로 보는 극단적 이원론에 사로잡혀 있었고[13] 따라서 순수한 선의 실체로서의 알라가 악의 원천인 물질을 만들어 냈을 리 없었다고 믿었다. 그의 견해(또는 당시 이슬람 철학자들)에 따르면 물질이란 결코 알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며, 단지 영원한 시간부터 존재해 왔다. (이는 흔히 세계의 영원론 이라고 불린다.)이를 알 가잘리는 알라의 창조 능력을 부정한다고 보았다. 알 가잘리는 이를 저서 『철학자들의 부조리』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과연 당신은 세계가 영원의지에 의해 무로부터 창조되었다는 주장을 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세계가 존재해야 할 때, 영원 의지는 세계의 존재를 명한다. (중략) 과거의 시간 속에서는 알라가 세계의 존재를 의지하지 않았고, 따라서 세계는 창조되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 창조 바로 그 시점에서, 알라의 영원의지는 세계의 존재를 의지했고 따라서 세계가 창조되었던 것이다. 과연 이러한 나의 생각이 틀리고 잘못 되었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14]

 이에 이븐 루시드는 알 가잘리의 주장을 비판하기 위해 한 가지 본질적 의문을 제기했는데, 그것은 바로 “무로부터의 창조가 꾸란에 정확하게 언급되어 있는가?” 였다. 그는 이를 『종교와 철학의 조화에 관한 소고』에서 집중적으로 다루며, 꾸란은 무로부터의 창조론을 뒷받침하고 있지 못하다고 밝혔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꾸란은 오히려 세계의 창조 이전에 무엇인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3가지 꾸란의 구절을 예로 해설을 덧붙였다.

『“알라는 육일 동안에 하늘과 땅을 창조 하셨다. 그리고 알라의 권자는 물위에 있었다(꾸란11:7). 이 구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액면대로 받아들이자면, 현존재 이전에 다른 존재가 있었으며 그것은 바로 권좌와 물이다. 또한 천체의 운동 횟수를 기준으로 한 현시간 이전에 다른 어떤 시간이 있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느 날 지구가 다른 모습으로 변하고, 하늘도 그렇게 될 것이다(꾸란 14:48). 이 구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액면대로 받아들이자면, 현존재 이후에 다른 제2의 존재가 있게 될 것을 의미한다.

『“알라는 하늘을 돌아보셨고, 그 때 하늘은 연기였다(꾸란 41:11)” 이 구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액면대로 받아들이자면, 하늘은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창조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15]

이와 같이 이븐 루시드는 알 가잘리의 주장이 꾸란에 의해 뒷받침 될 수 없음을 증명했다. 그는 세계 창조론에 대해 불가지론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에 따르면 세계가 무로부터 창조된 것인지 혹은 영원한지에 대해서는 철학과 종교 그 어디에서도 확실한 답변을 구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질문은 논증의 대상이 아닌 논쟁의 대상이며 그것은 여러 가지 해석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것을 시사한다.

그의 입장에서 볼 때에 알 가잘리는 자신의 것만을 유일하게 옳은 해석이라고 강요했던 것이며, 그것이 최대의 부조리였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세계 창조론은 꾸란에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으며, 그것은 단지 해석일 뿐이다. 알라가 순수한 무의 상태에서 혼자 존재하고 있었다라고 명시하는 구절은 꾸란에 없다.[16]

 

2 논쟁: 철학자들은 알라가 개별적인 사실에 대해 인식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특수자들에 대한 신의 인식가능성의 부정)

 이 논쟁은 알라의 인식 능력에 관한 의견 대립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1 논쟁에서 다룬 창조 능력에 관한 논쟁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븐 시나(또는 당대 철학자들)는 순수한 선의 실체로써의 알라가 물질로 구성된 지상 세계와 어떤 식으로도 관련되어 있지 않다고 보았다.[17] 따라서 알라가 세계를 창조하지도 않았으며, 세계를 직접 인식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알라는 개별자를 모르며 단지 보편자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18]

 이에 알 가잘리는 이것이 이슬람의 근본을 무너트리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왜냐하면 꾸란은 전지전능한 알라의 능력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알 가잘리는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왜 철학자들은 불가능하다고 보는가? 영원자 알라는 중개자를 통해 피조물을 창조한다. 피조물이 창조될 때 영원자는 그 것에 대해 지식을 얻는다.[19]

『꾸란에는 하늘과 땅에 있는 미립자의 무게조차도 알라의 지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고 적혀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븐 시나는 알라가 보편적인 지식으로써만 사물을 인식한다고 말한다.[20]

 이 논쟁에 관련하여 이븐 루시드(아베로에스)는 크게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한다.

l 이븐 시나와 알 가잘리의 주장 모두 올바른 논증성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

l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논쟁과 전혀 무관하다.

 그는 논리성을 중요시 했던 철학자로써 어떤 의견의 진위를 판단할 때 결론 자체보다 그 결론이 올바른 방식으로 추론 되었느냐를 더욱 중요시 여기는 학자였다.[21] 따라서 『부조리의 부조리』에서, 이븐 시나와, 알 가잘리의 의견 모두가 논증성이 결여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게 된다.

 이븐 루시드가 보기에, 이븐 시나와 알 가잘리 모두가 범한 치명적인 방법론적 오류는 인간지식을 예로 들어 알라의 지식에 관해 판단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지식과 알라의 지식은 근원적으로 다른 별개의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지식을 예로 들어 알라의 지식에 관해 논할 수 없다. 즉 완전히 다른 별개의 것이라는 뜻이다.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 논쟁의 근원은 창조주의 지식을 인간의 지식에 비유하고자 함에 있다. 즉 인간의 지식에 근거하여 알라의 지식에 대해 유추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인간과 알라의 인식 능력에 대해 이븐 루시드는 이븐 시나와 알 가잘리의 의견을 반반씩 수용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정리했다.

 “인간의 지식은 사물의 변화에 따라 결과되는 것이기 때문에 변화할 수밖에 없다.” 라고 이븐 시나의 입장에 찬성하였고, “알라의 지식은 사물의 원인으로써 아무리 변화하더라도 결코 변화하지 않는다.” 라고 알 가잘리의 의견에 동의했다.[22]

 따라서 알라의 지식은 시간의 제약을 초월하며 영원 속에서 개별자를 인식하게 된다. 본 논쟁은 알라의 인식 능력에 관한 것이기에 이 부분만 국한한다면 그의 답변은 알 가잘리의 것과 동일하게 보이지만 그는 방법론을 더욱 중요시했기 때문에 이러한 우연한 결과의 일치는 무의미할 뿐이었다. 그가 알 가잘리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은 것 또한 이 때문이라 시사된다.

 이븐 루시드는 이러한 자신의 입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서 그는 개별자에 알라의 인식 가능성을 부정한 것은 이븐 시나일 뿐이며, 소요학파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추종자들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는 일 가잘 리가 이븐 시나의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혼돈하여 양자를 똑같이 취급하는 것은 오류라고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내 견해로는, 알 가잘리는 소요학파 학자들의 의견을 오해하여, 그들이 알라가 개별자를 전혀 모른다고 전했던 것으로 보인다.[23]

 그에 따르면 소요학파는 진정한 예시(The true vision)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미래에 발생할 개별적 사건들에 대한 예언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것이라고 한다. 즉 소요학파는 알라가 인간과 다른 방식으로 인식한다고만 언급했을 뿐 개별자에 대한 인식 능력을 결코 부정한 적이 없었다.

 정리하자면 이븐 루시드의 주장은 어떤 인식의 상태가 보편적인가 혹은 개별적인가는 인간의 지식에만 해당되는 개념이며, 알라의 지식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즉 알라의 지식에 대해 옳다 그르다. 라고 개념 정의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에, 따라서 알 가잘리가 시도했던 불신자 선언은 전혀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논증적으로 따져 볼 때, 지식은 보편적이니 개별적이니 하고 묘사되어 질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해 이견이 존재한다고 논하는 것은 의미 없는 짓이다, 즉 철학자들에 대해 불신자 선언을 해야 하느냐 혹은 말아야 하느냐는 전혀 의미가 없는 일이다.[24]

 

3 논쟁 : 철학자들은 육체적 부활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사후 신체의 부활에 대한 부정)

 

 

 부활에 관한 논쟁 또한 제1 논쟁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에 관련 이븐 시나는 인간의 육체적 부활을 부정했으며, 이에 대해 알 가잘리는 육체적 부활은 가능하다고 반박했다. 이러한 의견 대립은 제1 논쟁에서 나타난 입장 차이를 보면 매우 당연한 결과였다.

 이븐 시나는 극심한 이원론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초월적 존재인 알라는 육체, 물질세계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 , 알라는 물질세계를 창조도, 인식도 하지 않는다. 여기서 그에 따르면 육체적 부활이 가능하려면 육체가 새롭게 창조되어야한다. 하지만 알라는 육체를 새롭게 창조할 수 없고, 따라서 영혼만이 부활이 가능하다.

 하지만 알 가잘리에 의하면 알라의 무한한 능력은 필요할 때 물질을 얼마든지 새롭게 창조할 수 있다. 따라서 육체적 부활은 하등의 문제점을 수반하지 않으며,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이븐 시나의 주장은 알라의 창조 능력을 부정하는 것으로써 불신자의 죄를 범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을 근거로, 알 가잘리는 이븐 시나와 아리스토텔레스학파를 비롯한 모든 철학자들을 상대로 불신자 선언을 했다.

(중략) 알라는 물질을 재창조 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무로부터 세계를 창조하는 알라의 능력을 부정할 뿐이다.[25]

 이븐 루시드는 『부조리의 부조리』의 문제 19 20에서 부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앞서 논의한 두 가지 문제점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알 가잘 리가 범한 오류를 2가지 방향에서 지적했다.

 

1. 이 논쟁의 핵심은 순수한 종교적 주제와 관련된 것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전혀 관련이 없다.

2. 이븐 시나의 주장이 옳다고 할 수는 있지만, 그를 불신자라고 몰아붙일만한 근거는 꾸란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븐 루시드가 보기에 알 가잘리는 이븐 시나와 아리스토텔레스를 구분하지 못했다. 알 가잘리는 이븐 시나의 주장이 무조건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을 대변하는 것처럼 묘사하곤 했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계승자이던 그는 이 논쟁의 주제는 고대 예언자들이 다뤄온 순수한 종교적 문제일 뿐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고대 철학자들과 하등의 연관성이 없다고 강조했다.

『고대 철학자들 가운데 이 문제에 대해 거론한 자는 아무도 없다 지난 천년동안 부활의 문제는 각 종교에서만 언급되었을 뿐이다. 물론 일부 철학자들이 이 문제를 거론하고 있긴 하지만, 이것은 최근의 일이다. 육체적 부활에 대해 처음으로 말했던 자들은 모세 이후의 이스라엘 예언자들이었다. 우리는 시편에서 육체적 부활을 언급하고 있다는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신약에서도 육체적 부활을 확언하고 있다. 또한 예언자 예수도 육체적으로 부활했다고 전해지고 있다.[26]

 이와 같이 이븐 루시드는 부활의 논쟁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관계가 없으며 알 가잘 리가 이 문제를 근거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불신자 취급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말한다.

 한편 그는 부활은 순수한 종교문제이기 때문에 철학이 개입해서는 안 되며 오직 종교적 틀 안에서만 논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문제는 꾸란에 대한 해석의 문제로 귀착된다. 이 맥락에서 그는 『꾸란이란 종교 텍스트는 무엇이고, 그 것을 어떻게 읽어야 하며, 그 읽음에 대한 불신자 선언이 가능한가?』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꾸란의 담론은 형식적으로 볼 때 비유가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며, 그것은 사물 자체가 아닌 그에 상응하는 예와 형상으로써 간접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리고 이같이 비유적 형식이 많이 사용되는 이유는 계시의 목적성 때문이라고 본다. 즉 꾸란의 계시 목적은 인류의 행동과 윤리를 바로잡기 위함인데, 대중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가능한 상대적으로 쉬운 비유적 형식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꾸란에는 사후세계가 매우 육감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27] 알 가잘리의 경우 이를 근거로 육체적 부활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븐 루시드는 이러한 것은 대중의 이해를 돕고 그들로 하여금 선행을 하도록 만들기 위한 목적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에 관련 이븐 루시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부활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부활을 육체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영적으로 묘사하는 것보다 낫다. 알라께서 말씀하셨다. “의로운 자들에게 약속된 천국을 비유하사, 그곳에 강물이 있으되 변하지 아니하고. (꾸란 47:15;)”』[28]

 알 가잘리는 꾸란이 육체적 부활에 대해 명백히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철학자들에 대한 불신자 선언은 정당하다고 선언했다. 이는 그의 저서 『이슬람과 무신론의 차이』에서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중요한 교리의 원칙과 관련하여, 확실한 증거 없이 함부로 꾸란의 문자적 표현을 변경하는 자는 마땅히 불신자 판결을 받아야 한다. 육체적인 부활과 저승에서의 처벌 등을 부정하는 자는 정말로 불신자 판결을 받아야 한다. 영혼이 육체로 귀환할 수 없음을 증명할 증거는 결코 없다. 이것은 종교에 해악을 미치며, 따서 이것을 말하는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불신자 판결을 받아야 한다.[29]

 이와 같은 알 가잘리의 선언에 이븐 루시드는 이의를 제기한다. 이것은 그가 부활에 대한 꾸란의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알 가잘 리가 인용한 꾸란 구절은 부활의 원리가 아닌 묘사에 관련된 것으로, 그 구절이 해석되어야 하는지의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부활에 관한 구절은 해석되어야하는 범주에도, 해석되지 말아야 하는 범주에 속한다고도 단언하기 힘들다. 따라서 이 구절에 관한 해석의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될 수 없다. , 꾸란은 대중의 계몽을 위해 부활을 육체적으로 묘사할 뿐, 그것이 부활의 원리 자체를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입장에서, 육체적 부활인가 혹은 영적인 부활인가 혹은 그 둘 다인가 등과 같은 것들은 단지 부활의 묘사에 대한 의견차이일 뿐이다. 그중 어느 것도 부활의 원리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며, 따라서 부활의 원리를 부정하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이 문제를 근거로 불신자 선언을 할 수 없다. 이에 대해 이븐 루시드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이 문제에 대해 오류를 범하더라도, 그 학자는 용서 받고 보상을 얻는다. 부활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이상 그러하다. 즉 어떤 해석을 하든 그 해석은 부활의 묘사에 관한 것이지 부활의 존재 여부에 대한 것은 아니다. 그 해석이 부활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이상 불신자 선언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불신자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율법(샤리아)의 원칙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30]

  그의 견해에 따르면 꾸란이 말하고 있는 부활의 원리는 영혼 불멸이다. 만일 꾸란의 구정 중 부활을 육체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대중의 이해를 돕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또한 이븐 시나의 경우 육체적 부활을 부정했고 영적 차원에서만의 부활이 가능했다고 했기에, 이븐 루시드가 보기에 이 주장은 비록 육체적 부활의 가능성은 부정했지만, 부활의 원리인 영혼 불멸만은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알 가잘리의 불신자 선언은 꾸란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음을 밝힌다.

『이 문제와 관련하며, 학식 있는 모든 자들의 의무는 자신이 연구한 결과를 정직하게 믿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연구한 바가 종교적 원리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즉 미래의 삶이 존재한다는 원리를 부정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일 그러한 원리를 부정한다면 그 자는 바로 불신자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래의 삶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경전과 이성을 통해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원리 전체는 영혼 불멸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31]

 이 논쟁들을 살펴 볼 때에 이븐 루시드가 천착한 최대 관심사는 그리스(헬라) 철학과 이슬람 종교 간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가에 있었다.

 그는 종교와 철학 간의 갈등은 근원적으로 텍스트 해석의 문제에서 기인한다고 여겼다. 따라서 그는 알 가잘 리가 제기한 논쟁들을 다루기에 앞서 자신의 독특한 해석학적 원칙을 정립했으며 그것들은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요약된다.

1. 종교는 종교의 틀 한에서 그리고 철학은 철학적 틀 안에서 이해한다.

2. 꾸란의 구절 가운데 원리에 해당되는 것은 해석해서는 안 된다.

3. 꾸란을 해석할 수 있는 자격은 오직 학문에 정통한 자들에게만 국한된다.

4. 학문에 정통한 자들은 자신들의 해석을 함부로 대중들에게 발성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된다.

(이는 사실 현대에 와서의 과학과 종교간의 대립과도 비슷하다 여겨진다. 대표적인 한편으로 모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는 창조 과학회가 이븐 시나에 비유될 수 있겠고, 알 가잘리는 그것을 반대로 비판하는 기독교적 입장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또는 창조 과학회가 알 가잘리, 이븐 시나를 도킨슨과 같은 학자에 비유할 수도 있겠다. 사실 이것 또한 전문성과 이해의 결여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고 여겨지기에 이 또한 우리의 숙제라 생각된다.)

 

이러한 해석학적 원칙에서 이븐 루시드는 알 가잘리의 논쟁 속에서 발견된 모순점들을 지적했는데, 그 내용은 크게 다음의 두 가지로 나눠진다.

1.  알 가잘리의 논쟁은 텍스트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결여하고 있다. 이븐 루시드는 모든 학문에는 고유의 원리가 있다고 주장함으로, 종교와 철학은 반드시 각각의 틀 안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전제로 내세웠다. 신학자의 경우 철학에 대한 정통적 지식 없이 함부로 종교적 잣대를 휘두를 수 없기에 알 가잘리의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정통하지 못한 이븐 시나의 철학 텍스트에 의존하는 주장으로써 이븐 시나를 넘어 모든 철학자를 불신자 취급하는 오류를 범했다. 또한 알 가잘 리가 내세우는 이슬람의 원칙 또한 전혀 꾸란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지 않다.

2.  알 가잘리는 자신의 개인적 해석을 강요하려는 독단주의에 빠졌다. 이븐 루시드는 논쟁의 주제들이 꾸란에서 명확히 언급되지 않는 이상 그 것들은 언제까지나 해석의 문제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꾸란의 해석은 오직 학문에 정통한 자들에게만 자격이 주어지며, 일반 대중들에게 이 문제를 거론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꾸란이 계시된 목적은 일반 대중들로 하여금 성행을 하도록 계도하는 것에 있는 것이지, 이론적 논쟁을 촉발시키는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학문적 기반이 없는 대중들이 이에 휘말릴 경우 그들은 꾸란을 불신하게 되어 자칫 불신자가 되기 쉬운 것이다. 또한 이에 따라 이슬람에 치명적 해악을 끼친 자는 바로 이븐 시나가 아닌 알 가잘리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원래 논쟁이 분분할 수밖에 없는 주제들에 대해 마치 자신의 해석만이 유일하게 옳은 정답인 것처럼 말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알 가잘리는 대중들을 향해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독단적 행위로써 대중들을 신앙적 혼란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논쟁의 평가와 아베로에스의 영향

 

 이 논쟁을 살펴보며 알 수 있는 것은 아베로에스에 의하면 모순되는 두 주장에 대한 입장은 한쪽이 틀릴 수 있으며 진리를 계시하는 방식의 차이로 인한 상호간의 오류 발생이라는 것이다. 또한 알 가잘리는 오늘날의 문자해석주의로도 해석해 볼 수 있겠다. 사실 이와 같은 논쟁은 지금도 많은 학회와 대학 등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현재 과학과 신학의 마찰이 일어나는 일 또한 서로간의 다른 방식을 인정하지 않으며 서로 모순된다고 생각하는 무엇인가를 트집 잡아 독선적인 정죄 혹은 주장을 펼침으로써 기인됨을 미루어 볼 때 그는 선구적인 학자였다고 평가해 볼 수 있겠다.

 이러한 논쟁은 중세 이슬람 지성사의 최대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위에도 언급했듯, 서방 세계에 있어서 근대적 사고관을 촉발시킨 촉매가 된다. 이븐 루시드는 이슬람보다 서방 세계에서 높게 평가되는데, 12세기 이븐 루시드는 유럽 학자들 사리 가장 인기 있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학자였고, 그가 사망한지 한 세대가 흐르기 전에 그의 26권의 주석서들은 유대인 추종자들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되기 시작하였고, 1328년에는 『부조리의 부조리』도 『Destrucyio Destructionis』 란 제명의 라틴어 번역이 등장, 그의 사상의 진면목도 소개되었다. 이에 따라 추종자들이 모여들었고 13-14새기의 프랑스 파리와 이탈리아의 파두아(Padua)는 라틴 아베로에스 추종자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13세기 파리대학 인문학부 교수 시제루스(Sigerus, 1235-1282)는 가장 대표적인 그의 추종자로써, “철학을 철학적 틀 안에서 그리고 종교를 종교적 틀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아베로에스의 해석학 명제를 받아들여 이중진리설로 발전시켰다. 그의 이견에 따르면 철학, 이성을 따라 진리인 것이 신학, 신앙에 의해 반대의 것 또한 진리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32] 결론적으로 이븐 루시드는 세속주의, 상대주의, 다원주의 등의 근대적 가치관 형성에까지 공헌을 하게 된다. 그의 영향을 받은 학자로는 시제 브라방[33], 보에티우스 다치아[34]가 있으며 이 경우 당시 상당한 논란을 일으킴으로 토마스 아퀴나스[35] 까지도 영향을 받게 된다.

 결론적으로 아베로에스이자 이븐 루시드는 이슬람의 철학자이지만 기독교의 세계 속에, 저명한 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에까지 영향을 끼칠 정도로 상당한 바람을 일으켰으며 추종자를 만들었다. 따라서 그는 이슬람철학, 그리고 중세 철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합리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다.

 

 

참고문헌

 

l 서병창, “신앙과 이성의 관계와 이중진리론 –시제와 토마스를 중심으로-, (연구논문, 연세대학교, 2010)

 

l 이경재, 이중진리론과 전제의 차이: 라틴 아베로에스주의자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립“, 『대동철학회지』 제61 (2012 겨울), 169-173

 

l 이재경, “중세 이슬람 철학의 합리주의 흐름”, 『철학논총』 제33(2003 여름), 295-315

 

l 이재경, “중세 이슬람철학의 합리주의 연구”, (연구보고서,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2002)(위와 동일 내용)

 

l 이제경, “시제 브라방과 이중진리론 – 지성적 연혼에 관하여 제7장” 『중세철학』 9(2003), 221-245

 

l 이재경 “조화에서 분리로 : 13세기 이성과 신앙의 관계” 『철학논총』 제44집 제2(2006.여름)

 

l 이재경 “보에티우스 다치아와 이중진리” 『범한철학』 제 58(2010년가을), 55-77

 

l 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종교학대사전』, (서울: 한국사전연구사, 1998)

 

l 철학사전편찬위원회, 『철학사전』, (충북: 중원문화, 2009)

 

l 아베로에스(이븐 루시드), 이재경 옮김, 『결정적 논고』, (서울: 책세상, 2005)

 

l 박성은, “알 가잘리의 신 개념 – 초월과 내재의 관점에서”, (박사학위논문, 백석대학교대학원, 2008)

 

l 김정명, “중세 이슬람 세계에서의 철학과 종교간의 갈등 – 이슬람 신플라톤 철학과 전통적 창조관 간의 충돌” 『대동철학』 제61 (2012년 겨울), 33-62

 

l 이재경, “아베로에스와 내세의 문제 – 종교와 철학의 관계를 중심으로” 『대동철학』 제61 (2012년 겨울), 63-81

 

l 김정명, “이븐 루시드의 해석학과 알 가잘리 비판”, 『한국이슬람학회논총』제15-1 (2005), 107-132

 

l 김정명, “철학자들에 대한 알 가잘리의 비판과 그 정치적 배경”, 『한국이슬람학회논총』 제 13-2(2003), 22-44

 

l 황병하, “이슬람사상에서 형식주의와 합리주의 연구”, 『韓國中東學會論叢』 제 11-1(1990), 205-233



[1] 절대적 제 1 원리를 의미하는 신플라톤(neo-Platonic) 철학적 전문적 용어.

플라톤(Platon)은 피타고라스(Pythagoras)의 영향을 받아, 그들의 수()의 이론과 자신의 이데아론은 종합하여 일자와 최고의 이데아를 같은 것으로 보았다. 이를 계승한 신플라톤학파의 플로티노스(Plotinos), 일자를 모든 존재계열이 그것에 의존하고 만물이 그로부터 유출되어 다시 그것으로 돌아가는 가장 완전하고 근원적인 실제로 보았다 - 『교육학용어사전』, 1995.6.29, 하우동설

[2] 박성은, “알 가잘리의 신 개념 – 초월과 내재의 관점에서”, (박사학위논문, 백석대학교대학원, 2008), 16

[3] 아비첸나에게서 유래된 논리학의 목표에 대한 설명, Cf. Sham Inati, Logic, in History of islamic Philosophy, 2: 802-823

[4] 이재경, “중세 이슬람 철학의 합리주의 흐름”, 『철학논총』 제33(2003 여름), 295-315

[5] 이재경 “조화에서 분리로 : 13세기 이성과 신앙의 관계” 『철학논총』 제44집 제2(2006.여름), 316

[6] 김정명, “이븐 루시드의 해석학과 알 가잘리 비판”, 『그것은 다음과 같다. 한국이슬람학회논총』제15-1 (2005), 107-132

[7] 김정명, “철학자들에 대한 알 가잘리의 비판과 그 정치적 배경”, 『한국이슬람학회논총』 제 13-2(2003), 22-44

[8] 김정명, “중세 이슬람 세계에서의 철학과 종교간의 갈등 – 이슬람 신플라톤 철학과 전통적 창조관 간의 충돌” 『대동철학』 제61 (2012년 겨울), 33-62

[9] 논지상 생략한 알 파라비와 이븐 시나의 사상을 알고 싶을 경우에 좀더 자세한 내용은 8번 각주의 논문을 참조할 것.

[10] 김정명, “철학자들에 대한 알 가잘리의 비판과 그 정치적 배경”, 『한국이슬람학회논총』 제 13-2(2003), 22-44

[11] 알 가잘리의 불신자 선언에는 정치적 배경 또한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 과제의 논지에서 벗어나므로 생략하도록 하겠다. 자세한 것은 김정명, “철학자들에 대한 알 가잘리의 비판과 그 정치적 배경”, 『한국이슬람학회논총』 제 13-2(2003), 22-44 32-42를 보길 바란다.

[12] 아베로에스 또한 내세의 문제에 대한 견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사항은 논제와 벗어나지 않기 위해 생략하였으며 자세한 사항이 필요할 시 이재경, “아베로에스와 내세의 문제 – 종교와 철학의 관계를 중심으로” 『대동철학』 제61 (2012년 겨울)을 참조하기 바란다.

[13] 이러한 학론 까지 언급하기 위해서는 사실상 이슬람뿐만이 아닌 조로아스터교, 이누마 엘리쉬, 자이나 교 와 같은 고대 종교, 문헌까지도 언급해야 하므로 논제로부터 벗어나지 않기 위해 이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사실 이 질문은 신정론에서도 거론되는 질문중 하나이다.

[14] Al Ghazali (a) 1993, 42

[15] Ibn Rushd 1991, 42-43

[16] Ibid

[17] 이는 초대 교회사에서도 비슷한 문제로써 영지주의가 존재했다. 당시 초대교회는 이러한 문제를 계기로 무로부터의 창조와 같은 논쟁들에 대한 교리확립과 함께 이러한 혼란의 방지를 위하여 현대에 이르러 사도신경, 즉 공식적인 문서로는 니케아 신조로 기록된 신조로 선을 그음으로써 해결했다. 따라서 이것은 철학과 신학사이에서 발생될 수밖에 없던 논쟁으로 추측된다.

[18] 여기서 그가 말하는 개별자란 물질과 결합되어 구체화된 존재를 말한다. 반면에 보편자란 개별자에게서 물질적 속성을 제거하고 남은 관념적 개념에 해당한다. 이는 각주 11과도 연결되는 문제이다.

[19] Al Ghazali (a) 1993, 149

[20] Al Ghazali (a) 1993, 142

[21] 따라서 그는 어떤 결론이 자신의 것과 다르더라도 올바른 추론에 의해 도달된 것이라면 최소한 그 사고 체계 안에서 만큼은 올바르다고 인정했다. 반대로 어떤 결론이 자신의 것과 우연히 일치하더라도 그것이 잘못된 추론에 의거한 것이라면 가차 없이 비판을 가했다.

[22] 알라의 지식은 사물의 원인으로, 사물이 변화하더라도 결코 변화하지 않는다.

[23] Ibn Rushd, 1991 39

[24] Ibid, 40

[25] AI Ghazali 1993a, 213-214

[26] Ibn Rushd, 1991, 324

[27] 예를 들자면 천국에 들어간 자는 육체적 쾌락을 느끼고 지옥에 던져진 자는 지옥불의 뜨거운 맛을 보게 될 것이라고 언급된다.

[28] Ibid, 326

[29] Al Ghazali (b) 1993: 70

[30] Ibn Rushd, 1991, 48

[31] Ibn Rushd, 1998: 204

[32] 이는 철학과 이성을 기독교회의 권력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한 시도였으며 그것은 17세기의 데카르트의 심.신 이원론과도 비슷하다.

[33] 다른 해석에 따르면 그 또한 이중진리론으로 분류되는 그 자체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34] 이 경우 시제 브라방과 비슷하다고는 하지만 조금은 다른, 즉 모순된 진리는 성직자들의 편협한 시각에 의해 일어난다고 보았다. 이제경, “시제 브라방과 이중진리론 – 지성적 연혼에 관하여 제7장” 『중세철학』 9(2003), 221-245 참조

[35] 초대 교회사에서 이단으로 인해 정통이 생기듯 아퀴나스는 이 논쟁에서 자신의 입장(카톨릭)을 위해 글을 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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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철학사를 통해 바라본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하여


이전에 대학시절 작성한 글입니다
(블로그 이전중)

중세철학사를 통해 바라본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하여
담당교수: 김희봉
신학부 윤동성 

목 차
Ⅰ. 서론

Ⅱ. 중세에 있어 신앙과 이성의 2가지 전통

  1. 플라톤 선상의 신앙주의
   가. 아우구스티누스
   나. 안셀름
  2. 아리스토텔레스 선상의 합리주의
   가. 아베로에스(이븐 루시드)
   나. 토마스 아퀴나스
  3. 소결론
Ⅲ. 현대 사조 속 신앙과 이성

  1. 신정론
  2. 현대 포스트 모더니즘
    가. 구조주의
    나. 실존주의
  3. 새로운 관점, 비판적 합리주의
Ⅳ. 결론
참고문헌

Ⅰ. 서론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세상속에 살아가는 과정에 있어, 자신이 알고있는 다른가치, 이성과의 부딫힘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신앙의 신비적 요소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환경속 사유가 다르기 때문에 상당히 필연적이라고까지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사이에서 오는 괴리에 의해 신앙이 왜곡되거나, 또는 이성을 아예 무시해버리기도 하여 세상과 신앙 단절시켜버리는 경우 또한 허다하고, 흔히 말하는 시험들림으로 신앙이 도전받기도 한다.
 또한 이성이라고 표현하지만 실질적으로 다루게 될 논제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철학과 신앙과의 관계는 이전부터 대두되어 오던 것으로 여기서는 많은 문제점, 논쟁이 발생하고 또한 이 논쟁에서 우리는 교권이 무너지기도 하는 모습을 역사속에서 쉽게 봐왔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해보면 이 신앙과 이성의 관계는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생활선상에서 시작하여 좀더 나아가 중세에서는
 그런 의미에서 이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한 고찰은 매우 의미있으며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앙과 이성의 조화, 이것은 신앙과 탐구 사이의 불가분리적 관계에 있는 신학의 중요한 과제중 하나님이 분명하다. 고전적 정의에 따르면 신학이란 fides quaerens intellectum(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으로 정의된다. 이것은 여러 변형된 형태로 알려져 왔고, 그 자체로 오래되고 풍성한 전통을 지닌다.
 이 관계는 근대적 통념 속, 통상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왔고, 근대이래. 종교와 철학이 분리되면서 이 둘은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어떤 무엇이라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그렇다면 믿는 것과 생각하는 것은 대립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 또한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생각은 믿음에 기반하고, 믿음은 생각을 통해 자라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과 생각사이 이분법적 구조를 구축하려면, 그들 사이에 Fact, 사실의 영역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 사실이 믿음과 생각사이 어떻게 이해되느냐에 따라 미 믿음과 생각사이의 태도가 정해진다. 
 그런데, 이 “사실” 이라는 것은 과학 분야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과학의 사실도 어느 정도는 믿음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물론 과학의 사실에 대한 언급은 정상과학이라는 일정한 패러다임에 근거하기 때문에 믿음에 근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전자의 흔적을 눈으로 관측할 순 없고, 진화가 사실상 입증되기보다는 합리적 해석을 위한 이론적 틀이기도 하지 않은가 라는 점에서 미루어 볼 때 다만 어느 정도의 맹목적이지는 않으며 합리적인 선에서의 믿음을 요청할 수 있다.
 이러한 과학과 달리 신앙은 반대라고 생각하여 이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믿음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이 신앙에서 신의 정의 속성 등을 연구하는 것은 합리적 추론을 통해 근거를 찾아간다고 볼 수 있다.[김선하 외 4명, 『종교와 철학 사이』, 서울: 늘봄, 1996]
 따라서 신앙“과” 이성의 관계 즉 그 “그리고”and 의 관계는 언제나 대립적인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해석의 입장, 태도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예를 들어 고대 저술가 터툴리안[Quintus S. F turtullianus, 160-220]은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라고 반문하면서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라는 말을 남겼다.
 터툴리안의 이 말은 기독교와 철학은 아무런 관련이 없고, 그래서 철학적 이성의 기반인 합리성을 철저히 배격하는 태도로 해석되어왔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죽은 자의 부활을 논증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고려한다면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주변적 상황에 대한 고려를 한다면 터툴리안이 본래 말하고자 했던 것을 온전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부활을 주장하면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에 기반하여 불합리성을 합리적 이해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1. 죽은 자의 부활이란 합리적 이해의 수준에서 불합리한 사건이고, 그 말은 상식적 합리성을 근거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2. 이 논증을 펴는 사람도 불합리성을 상식선에서 공유한다.
3. 하지만 그럼에도 이 불합리성을 끝가지 주장한다면, 이제는 오히려 그 불합리한 사건이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을 불합리하다고 여길 것을 아는데도, 그 주장을 고집한다면 거기엔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이렇게 볼 때는 터툴리안이 이성을 배격한 것이 아닌 불합리하게 여겨지는 죽은 자의 부활을 합리적으로 논증하고 있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신앙과 이성의 관계는 생각 이상으로 복잡하고 중층적인 양상을 지니고 있기에 이것을 단지 이분법적인 선택의 문제로 환원시키기에는 무리가 따른다는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둘 때에 우리는 신앙과 이성 사이에서 취할 수 있는 입장을 살펴볼 필요성이 시사된다.[김선하 외 4명, 『종교와 철학 사이』, 서울: 늘봄, 1996, 45]




Ⅱ. 중세에 있어 신앙과 이성의 2가지 전통

 보통 신학과 철학 사이에서 취할 수 있는 이 입장은 일반적으로 합리주의와 신앙주의로 대두되는데 공교롭게도 이 두 노선에 있는 학자들을 나누어 보면 철학의 두 전통적 노선과 일치하게 나뉘게 된다. 이는 그 사유방식에서 신앙주의의 진리는 이성적 추리(推理)를 극복한 신앙에 기초한다, 혹은 실재(實在)는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고, 다만 감정이나 신앙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과 플라톤의 사유 방식간의 친화성에서 오는 것이라 여겨진다. 이렇게 볼 때에 편의상 이 두 가지 전통적 입장은 여기서 이야기 하는 것에 한하여 두 가지 철학의 사유방식의 전통 선상에 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 같다.
 철학에 있어서 두 가지 전통이라 한다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 이 플라톤 선상에 있는 학자들이 신앙주의이자 다른 말로 믿음을 우선하는 전통이라 할 수 있으며, 이와 반대되는 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선상에 있는 합리주의이자, 생각을 우선하는 방식을 사유한 학자들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전통의 입장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이 둘의 관계를 살펴보려는 것이므로, 보에티우스와 같이 분리를 주장한 학자는 제외하겠다.)

 

  “Ⅱ-1” 플라톤 선상의 신앙주의(Fideism)
 신앙주의는 일반적인 사전적 정의로 종교적 진리는 이성적 추리를 극복한 신앙에 기초한다는 신학상의 입장이다. 좀더 나아가 실재는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고, 다만 감정 또는 신앙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입장이기에 합리주의적이지 않고 직관주의적인 것, 관념론적인 것 또한 이것에 포함된다. 조금은 신비주의성 경향 또한 띌 수 있다고 볼 수 있다.[철학사전편찬위원회 외 30인, 『철학사전』 (중원문화: 서울, 2012)]

    “Ⅱ-1-가“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다음의 두 가지로 정리했다.
1. 알기 위해서 믿는다.
2. 믿기 위해서 이해한다.
 먼저 알기 위해서 믿는다는 것은 그에 의하면 믿을 때 비로소 아는 것을 시작할 수 있다. 이것은 신앙이 이성보다 앞서며, 앎을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알기 위해 믿는다. 라는 방법은 두 가지 의미로 세분화 된다.
1. 믿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한다.
2. 믿음의 종국은 앎이다.
 하지만 무턱대고 아무 것이나 믿을 수는 없기에 어떤 것을 믿어야 할지에 대해 판단을 해주는 것이 바로 이성이라고 그는 말한다.
 여기서 믿기 위해 이해한다. 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이성이며, 이성의 인식 또한 계시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철저히 신의 계시 없이는 인식 또한 없으며 아는 것은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볼 때에 철저히 신앙을 앞서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전상현, “참된 진리의 탐구자 Augustinus의 신앙과 이성에 대한 연구”, (역사신학석사학위논문, 가톨릭대학대학원, 2009), 41-91]
    “Ⅱ-1-나” 안셀름
 안셀름은 앞서말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거의 그대로 물려받아 완성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으로써,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라는 문구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다.[신옥수 외1명 역, 『기독교 조직신학 개론』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2); DANIEL L. MIGLIORE, Faith seeking understanding : an introduction to Christian theology.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1, pp24-25]
그는 존재론적 신 증명으로 유명하며 스콜라 철학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된다. 그의 신 증명을 간단히 귀류법으로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신은 최고 존재자이다.
2. 최고 존재자는 이보다 더 위대한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존재자다.
3. 최고 존재자는 생각 속에서만 존재한다.(가정)
4. 최고 존재자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 생각될 수 있다.
5. 실제로 존재하는 최고 존재자는 생각 속에 존재하는 최고 존재자보다 위대하다.
6. 만일 최고 존재자가 생각 속에서만 존재한다면, 최고 존재자보다 더 위대한 최고 존재자가 생각될 수 있다.
7. 만일 최고 존재자가 생각 속에서만 존재한다면, 이보다 더 위대한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존재자보다 더 위대한 존재자가 생각될 수 있다.
8. 6,7은 불가능하다. (1,2의 공의)
9. 3은 거짓이다. (4,5,6,7의 공의)
10. 그러므로 최고 존재자는 실제로 존재한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은 안셀무스는 신존재에 있어 오로지 신에게만 유효하다는 것을 전재하고 있다. 우연적 존재와 필연적 존재를 구분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필연적인 존재가 하나님이라는 점을 논증한다. 그에 따르면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인데, 이런 존재가 자기 스스로의 존재에 의하지 않고 다른 존재에 의해 존재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모순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전재를 기반으로 그는 프로슬로기온에서 존재론적 신 증명을 주장하였고, 이 전제 속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상상할 수 없는 존재”와 부합하면서도 가우닐로, 칸트의 동전 비판을 피해간다.
 이렇게 살펴 볼 때에 신앙주의는 앞서 서론에서 언급하듯 종교적 믿음은 합리성의 시험을 거치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이다. 신앙은 오히려 신앙 외부의 합리성이 아니라, 신앙적 믿음 그 자체 안에 내적으로 근거하고 있다고 본다.[김선하 외 4명, 『종교와 철학 사이』, 서울: 늘봄, 1996, 46-47] 이 경우 20세기의 폴 틸리히는 종교의 토대로 “궁극적 관심”을 제안하는데, 종교적 믿음은 우리의 일상적 관심사가 아닌, 어떤 궁극적인 것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믿음은 합리적 근거가 있기 때문에 믿기보다, 오히려 그런 합리적 근거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믿음의 힘이 부각된다. 여기서 개인적으로 어디까지나 신앙적 요소를 깨트리지 않는다는 전제속 간단하게 수학적으로 예를 들 수 있는 “생각”을 해볼 수가 있었다. 무리수는 인간이 모르는 수다. 정확한 양을 계산할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볼 때에 라는 무리수를 인간, 우리가 살아가는 실제라고 가정하고, 기독교의 하나님 또한 라고 가정을 했을 때, 와 가 만나면, 즉 무리수와 무리수가 만나면 정수가 된다. 이렇게 볼 때에 우리 스스로가 완벽히 모든 것을 진리로써 조망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의견으로써 사실상 같은 무리수가 아닌이상은 성립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무리수를 정수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한 것이 이 방법이며, 무리수와 무리수가 만나 정수가 된다는, 인간과 그리스도가 만나 정수가 된다. 라는 이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생각을 한번 제시해보고 싶었다.)이 신앙주의적 입장에서는 조금 더 이상적이지 않을까 라는 의견이다.
 이 신앙주의에서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올바른가, 잘못된 믿음은 아닌가? 라는 것에 대한 검토가 없는 신앙은 믿음의 도약이며 그것은 신앙적 맹목주의를 조장하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믿음의 반대말은 불신앙 또는 비믿음이 아닌 몽매한 신앙이다. 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즉 무작정 신앙을 가지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주의라 하더라도 무작정 믿음을 전제하지는 않는다고 할 수 있다.

  “Ⅱ-2” 아리스토텔레스 선상의 합리주의
 아리스토텔레스–아베로에스–아퀴나스의 노선에 있는 합리주의적 신앙의 입장의 경우 믿음이란 합리성에 기반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때 이 합리성이 엄격한 증거에 기반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종교에 부정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왜냐하면 종교적 믿음은 증거에 기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c 영국의 수학자 클리포드(W.K. Clifford는 “불충분한 증거를 가지고서 어떤 것을 믿는다는 것은 어느 경우이건 그리고 누구이건 언제나 잘못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그가 종교는 이러한 엄격한 증거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김선하 외 4명, 『종교와 철학 사이』, 서울: 늘봄, 1996, 46-47] 하지만 이 전통선상에 있는 다른 학자들은 의견이 조금 다르다.

 
    “Ⅱ-2-가“ 아베로에스 (이븐 루시드)
 아베로에스는 이슬람 신학자로 신학과 철학은 서로 양립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철학을 통해 온전한 계시가 가능하며, 종교는 완전한 철학에 의존한다는 입장으로 철학은 진리를 인식하는 방법에 있어 종교보다 우위에 있고 완벽하다고 보았던 학자다.
 이러한 합리주의 노선상의 학자이지만 이슬람의 꾸란을 진리로 생각했던 학자이기에 기독교 신앙과는 관계가 없을 것 같지만, 그가 대두 돼야 할 진짜 이유는 바로 성경을 진리로 생각했던 아베로에스의 추종자들이 있기 때문인데, 파리 대학 인문학부 교수들 가운데 아베로에스를 철학의 스승으로 존경, 그의 합리주의 노선을 쫒아가려 했던 라틴 아베로에스 주의자들이다.[이재경, “중세 이슬람 철학의 합리주의 흐름”, 『철학논총』 제33집(2003 여름), 295-315] 그들은 아베로에스의 합리주의에서 좀 더 나아가 극단적으로 이중진리론을 주장하게 된다. 이 이중진리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학자로는 대표적으로 시제 브라방(시제루스)[Sigerus, 1235-1282]가 있으며 “철학을 철학적 틀 안에서 그리고 종교를 종교적 틀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아베로에스의 해석학 명제에서 출발하여, 철학, 이성을 따라 진리인 것이 신학, 신앙에 의해 반대인 것과 같이 진리로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물론 이에는 철학과 이성을 기독교회의 권력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라고도 생각된다.]
 예를 들자면 세계는 창조되었고, 시작이 있으며 무로부터의 창조를 의심할 수 없다는 성경의 진리와 철학적으로 운동의 절대적인 시작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무로부터의 창조가 불가능하며 세계의 영원성을 논증하는 것이 동시에 서로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양립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기독교 교리와 충돌을 일으켜, 아퀴나스를 비롯한 여러 신학자들에게 비판을 받고 단죄의 대상이 되었다.[서병창, “신앙과 이성의 관계와 이중진리론 –시제와 토마스를 중심으로-”, (연구논문, 연세대학교, 2010)]

    “Ⅱ-2-나”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의 경우 인간은 자연이성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진리들의 고유한 내적 근거들에까지 접근할 수 있고, 오직 신에 의한 계시를 통해 그것들을 참된 것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중적 논증 방식을 채용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사유했는데, 이 진리의 이중적 방식은 이성과 신앙을 대립구도에서 보고 양자를 분리하는 입장이 아닌, “은총이 자연을 전제하듯 신앙이 자연적 인식을 전제한다." 라는 입장으로, 자연이성이 접근할 수 있는 인식과 계시내용을 수학하는 믿음(신앙)의 구분을 명확히 그었다.
 이러한 맥락 속 그는 초자연적 계시에 대한 동의로써 신앙의 이성성(합리성, Vernunftigkeit)을 한편으론 철학적 신 존재증명과 부정논증(계시를 부인하는 이성의 주장이 결국 잘못임을 증명하는 논증)을 통해, 다른 한편으론 계시의 사실과 성경의 신적 권위를 증명해주는 기적들(miracula)과 예언들(prophetiae)을 통해 논증하였다.[김승욱, “신앙의 합리적 자기이해의 두 가지 모델  :  안셀무스와 토마스” 『누리와 말씀』 제23권(2008), 253-274]
 결론적으로 그는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서 신앙과 이성을 매개로 “양자의 통일성”을 탐구하고자 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경우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최대한 이룩했다고 평가받는 사람으로서. 합리주의 서두에 언급한 클리포드와 다르게 기독교 신앙이 합리주의의 합리적 기준에 부응할 수 있다고 보았다.[김선하 외 4명, 『종교와 철학 사이』, 서울: 늘봄, 1996, 46-47]
 이 경우 엄격한 증거보다는 합리적 기준을 합리성의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합리성의 기준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따라 종교에 대한 태도는 긍정일수도 부정적일수도 있었다. 즉 케른(W. Kern)의 지적대로 신앙의 내면적 논증근거들이 아닌 계시의 신뢰성을 증명하는 근거들이 관심사의 전면에 놓여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김승욱, “신앙의 합리적 자기이해의 두 가지 모델  :  안셀무스와 토마스” 『누리와 말씀』 제23권(2008), 253-274]
 이렇게 볼 때 합리주의라 하여 언제나 종교에 부정적인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이러한 합리주의적 태도가 종교의 입장에 건전하냐는 것이다. 신앙이 합리적으로 예측가능하고 계산 가능한 것의 지평을 넘어 있다고 생각하면, 믿음이 합리성에 근거해야 한다는 주장은 종교를 이성적 합리성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종교에 건전한 태도가 아니며 더 나아가 우리가 사유하는 모든 것들이 그렇게 합리적인 이성을 기반으로 이성적인 증거를 토대로 구축되었는가? 라는 것도 문제가 된다.
 우리가 세계를 사유하는 많은 것들이 합리적 고찰과 증거를 기반으로만 구성되진 않았기 때문이다. 좀 더 나아가 이성은 합리적인가 라는 질문을 할 때에는 우리의 지식이 권력 작용과 공모관계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권력관계를 기반으로 구축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경우 이성은 궁극적 의미로 지적일 수는 있어도 합리적일 수는 없다.(상대적으로 합리적이라는 것.)[김선하 외 4명, 『종교와 철학 사이』, 서울: 늘봄, 1996, 46-47]

  “Ⅱ-3” 중세사상사에서의 소결론
 지금까지 살펴볼 때에는 먼저 신앙과 이성을 분리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라는 소결론이 나온다.
 여기에 대한 개인적인 필자의 견해는 앞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철학과 신앙이 서로 상반되는 결과를 내 놓을 때는 진리는 하나이나 둘 중 하나가 틀렸다는 아베로에스의 주장을 지지하고 싶다(이것은 한편으로 그가 이중진리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대변한다).
 (화이트 보드에 써서 설명할것!) 살펴보자면 수학의 프렉탈의 시에르키핀스키에 대해 다른 접근으로써 이해가 쉬울 것 같다.

 
  그림과 같이 정삼각형을 그려보자. 그리고 그 삼각형 각 변의 중심을 이어보라 삼각형 4개로 나누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처음 그린 삼각형의 윗변 두 개의 길이와 한쪽 변에서 중앙까지 왔다가 다른 변까지 지그재그로 이어진 4개의 변은 길이가 같다는 것을 알 것이다, 거기서 또 삼각형을 나누어보라, 계속해서 극한까지 나누다 보면 언젠가는 밑의 한 변과 같아진다. 라는 가설을 기하학적으로 세워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각 변의 길이가 1일때 1=2라는 결론이 나오고 현제까지의 수학 체계가 무너진다.
 물론 실제 프렉탈의 시에르키펀스키 삼각형이 의미하고 있는 의도는 차원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비교할 수 없이 심오하지만 다행이도 이것에 대한 문제는 수학적으로 정립이 가능하다.

1. n번 분할한 삼각형의 한변 길이는 






이다.

2. n번 분할한 삼각형의 측정해야 할 변의 수는 


3. 따라서 n번째 삼각형의 측정해야 할 길이는 총  

  이기에.

4.   

라는결론이 나온다.

5. 이것은 무한급수를 대입할 때에 

이라고 생각하여 범해지는 오류인데, 4번의 식에서 2라는 값은 n에 대한 식이 아닌 변의 길이에 대한식이기에, 결론적으로 

가 된다.

 즉 하나의 진리에 극한까지 나누면 직선이 될 수 있다. 라는 다른 의견은 수렴할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그것의 과정상 공리가 잘못된 우를 범하고 있기 때문에, “공리에 의해 1=2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공리를 통해 제시할 수 있는, 어느 한쪽이 진리라는 것 또한 어디까지나 “과정” 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을 때의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현대에 와서는 이러한 문제가 더욱 복잡해져버렸다. 그것은 바로 과정이라는 것이 깨져버린 것인데, 이 이야기는 현대에 아우슈비츠 이후 재조명된, 어떻게 보면 개신교가 가장 어려워하고 빈약한 결론밖에 못 내리고 있는 신정론을 살펴보고 함께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다.

Ⅲ. 현대 사조 속 신앙과 이성
 앞서 말하듯 현대에 와서는 이 공리라는 것이 깨지게 되었고 따라서 결과를 두고 어떤 것을 논의하고 문제제기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서 자연스래 부상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신정론이다. 이 신정론은 2차 대전 이후 부상되긴 했지만 이전부터 이성적으로 상당히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기독교에 있어 난제로 여겨지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신정론 또한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생각함에 있어 숙지하고 넘어갈 중요성이 시사된다.

 
    “Ⅲ-1” 신정론
 신정론은 바로 신은 정의로운가를 논하는 학문이다. 한편으로는 신의 본질과 능력을 논하는 학문이기에 신학에서 가장 기본적인 학문이기도 하면서 실상적으로 우리의 삶과도 정말 가까이 닿아있는 부분이다.
 당장 예를 들어도 인간의 고통이라는 것을 들 수 있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작가들이 제시하는 논제이기도 하다(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 조프가, 이문열 인간의 아들, 권터그라스의 게걸음으로 가다 등). 과연 신이 존재한다면 왜 악이 존재하는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참상은 어째서 벌어지는가? 어째서 그것이 극복되지 않는가? 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이 문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전지한 존재자는 악을 어떻게 제거하는지 안다. 전능한 존재자는 악을 제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2. 완전히 선한 존재자는 악을 제거하기를 원하거나 악을 제거할 의무를 지닌다. 또한 선한 신은 악의 원인일 수 없다.
3. 악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세상에는 악이 존재한다.
4. 따라서 신은 선하지 않거나 전능하지 않다.
 이에 몇몇 학자들의 의견들을 살펴보면 먼저 “플라팅가”는 하나의 자유에 관한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이것은 현재의 세계가 모든 가능성중 최선이며, 신은 자유로운 피조물을 창조했으나 그들 중 일부가 옳은 길에서 벗어나면서 이것이 악의 근원이 되었고 이 사실로 인해 그의 전능성과 선이 훼손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면 그는 단지 도덕적 선의 가능성을 발휘함으로써 도덕적 악의 발생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신은 전능하지만 도덕적 선은 가지되 악은 가지고 있지 않는 세계를 창조하는 것은 그의 능력 밖이다 라는 제3의 명제가 발견된다.
 그렇다고 그는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스스로 무능 무지했다 라고 하기에는 그는 선하고, 악을 제거하기를 원한다는 명제에 어긋난다. 여기에 대해 절대 주권성으로 2번 명제를 피해가려고 한다 하여도 실상 부족하고 와 닿지 않는 답변일 것이다. 다른 학자들의 의견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선이 결여된 상태가 악이라고 이야기 한다. 마치 차가움이라는 것은 본질상 존재하지 않고 열에너지가 상대적으로 적은 상태임을 가리키고 어두움이라는 것이 빛의 부재로 인하여 나타나는 것처럼 그에 의하면 악의 원인은 선의 결핍이다.
 칸트는 인간이 본성상 약하며, 약한 심정에서 악이 생겨났다고 본다 하지만 선한 소질이 악한 성향의 원인이 된다는 것은 칸트에게 말이 되지 않는다, (칸트는 여기서 형이상학을 마주하면 이성은 그 한계에 부딫친다라는 말을 남긴다.) 따라서 이것에도 종교적 표상에서 마귀의 유혹으로 표현되는 어떤 악한 것이 필요하다. 이것을 요나스라는 학자는 합법적 준칙을 실현하기 위한 사유의 과정에서 비합법적 행위의 가능성을 생각한 것을 알게 된다는 것으로 자신에게 자신이 유혹되어 악한 성향이 약함으로 인하여 발동되었다고 본다.
 칼뱅은 이것에 하나님은 악독함을 창조치 않았지만 사탄의 대적을 허락하였고, 사탄에게서 악이 생겨났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이것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이 타락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라고 말한다.
 물론 이외에도 많은 해석과 논쟁이 있지만 그것에는 어떠한 공통적 가정이 존재한다. 그것은 신은 더 중요한 선에 필요하지 않은 어떠한 악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실질적인 인간의 고통, 감정과 닿아있다는 점에서 삶속에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이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점을 좀 더 확실히 해 준다.


    “Ⅲ-2" 현대 포스트모더니즘
 그런데 현대에 와서 이 문제는 더욱 더 복잡해졌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유방식을 유지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잘 알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이다. 과정과 다른 결과가 나오면 그 과정은 틀린 것이 되는데, 이런 일이 생김에 따라 과정에 대한 믿음이 약해졌다.
 이것은 역학에서 시작되었는데, 바로 잘 알고 있는 양자역학이다. 기본적으로 중세를 거쳐, 뉴턴, 코페니우스 등을 거쳐서 탄생된 것이 바로 고전 역학, 물리학이다. 이것을 종교는 이러한 정교한 법칙을 설계한 것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이용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배격하다가 이렇게 이용했다는 면에서, 이것은 앞서 말한 권력이 합리성을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것으로 현대에는 E=mc^2라는 기본적인 힘, 에너지와 중력장에 대한 이해도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상대성이론의 창시자인 아인슈타인도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 바로 양자 역학이다. 양자역학을 표현하는 유명한 이론 중에 물리학 개그 소제로도 많이 알려진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있다. 이것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어떤 고양이가 밀폐된 상자 안에 갇혀 있다. 상자 안에는 1시간에 2분의 1 확률로 1개 분해되는 알파입자 가속기가 있고 청산가리 통이 들어 있다. 만약 알파입자가 방출되어 청산가리 통의 센서가 감지하면 청산가리 통은 깨지고 고양이는 죽고 만다. 1시간 후 과연 고양이는 죽었을까 살았을까? 이것은 관측하는 순간 결정이 된다.
 쉽게 말하면 살아있는 고양이와 죽은 고양이를 서술하는 파동함수를 도입 시 50%는 죽어있고 50%는 살아있는 희한한 상태를 만들어내며, 관측자의 관측에 의해 상태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즉, 현상학에 있어 어떤 법칙을 통한 예측이 소용이 없어지고 결과만이 남는다는 것이다. 분명히 계산상에는 a의 위치에 있어야 할 입자가 b에 가있고 몇 번을 실험을 반복해도 계산과는 다른 결과가 나온다.
이것은 현대철학의 사조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자연의 실제가 안정된 형상이나 법칙성으로 이해되기보다 역동적이고, 복잡하고, 기묘한 그 무엇으로 이해됨에 따라 법칙과 공리라는 것이 깨지게 되면서 현실적으로 유효한 것이 아니라, 유효한 것이 진리이게 되는 결과를 불러왔다. 여기서는 기존의 모든 사유법칙도 통하지가 않는다. 다른 결과가 나오면 그 추론과 사유는 틀린 것이 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바로 핵심을 증거, 결과에 놓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라는 것이다. 과연 애초에 예수가 기적을 일으키지 못했다면 사람들이 반응했을까? 아니다. “기적” 이라는 것은 애초에 공리적으로 맞지 않는 결과, 가능성 높은 예측이 틀린게 되었을 때 나오는 말이다. 즉 합리적이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주목했고 반응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믿음은 합리적인 근거가 있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합리적인 근거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믿음의 힘이 부각된다는 신앙주의적 입장이 조금 더 힘을 얻는다고 조심스레 바라볼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이런 공리가 깨지게 되는 현상들이 방아쇠를 당기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 합리주의적이고, 기계화된 구조를 가진 사조, “모던“에 대한 일종의 반발로써 나타난 것이 바로 포스트 모더니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앞서 우리는 구조주의와 실존주의에 대해 알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다음 장에서 설명할 비판적 합리주의가 현대 포스트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이 두가지 사조 속에서도 상당히 이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Ⅲ-2-가” 실존주의
 실존주의는 사전적 정의를 따를 때에 “실존은 본질에 선행” 한다는 것이다. 실존에 의해 그 관계성을 맺게 되고 본질이 드러난다는 것, 이것은 주체성이 곧 진리다. 라는 점에서 본체론적 신증명과 상당히 유사성을 띄고 있다. 사실상 신앙주의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나라는 것의 존재가 우선된다는 점에서 데카르트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신앙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을 받아들이는 것이어서 그로 인해 생기는 "불확실성"을 불가피하게 갖고있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배척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용기를 지닐 때, 우리는 신앙의 역동성(dynamics of faith)을 구현할 수 있다. 즉, "신앙"은, 모험이 불러오는 불확실성 때문에 생겨나는 의심을 내적인 요소로 갖는 "궁극적 관심"이다.”
 이것은 잘 알고있는 신학자, 틸리히의 말이다. 틸리히는 불트만의 실존주의 신학을 계승한 신학자로써, 결론적으로 신앙을 “궁극적 관심”이라고 결론짓는다. 또한 불확실성이라는 단어에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이것이 신앙주의 연장선상에 놓여있음을 시사할 수 있다.

    “Ⅲ-2-나” 구조주의
 구조주의는 모더니즘을 비판하면서도 전통철학의 합리주의를 이어받은 사고, 방법론을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 구조주의는 합리주의를 수용하고는 있지만 근대적 합리주의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성중심, 서구중심, 그리고 인본주의적인 사고를 벗어나서 인간이 무엇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환경 자체가 인간 주체를 변형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물의 의미는 구조 안에서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에 따라 규정된다. 즉 본질이 정해진 것이 아닌, 구조에 의해 그 사물의 의미와 본질이 정해진다는 사상으로써 앞서 말한, 실존주의와는 다르게 상당히 구체성을 중시하면서도 그 자체로써는 어떠한 본질을 규정하기에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다.
   
 언급한 두가지 사조는 편향될 수도 있지만 실재(實在)는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고, 다만 감정이나 신앙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본 논고상에서는 신앙주의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살펴볼 때에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신앙주의도 무작정 이 믿음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올바른가, 잘못된 믿음은 아닌가? 라는 물음에 대한 검토가 없는 맹목적인, 몽매한 신앙을 경계한다. 역사 속에서 이 몽매한 신앙이 사람들을 비참한 결과로 인도한 경우는 충분히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주의에 의하면 믿음은 생각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믿음이 맹목적이기를 바라고 그렇게 조작하는 악한 행위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 믿음이 온전한 믿음이기 위해서는 바로 이 맹목적 믿음을 경계해야한다.
 즉, 신앙이 근본적으로 합리적 추론에 근거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형성된 믿음의 행위들에 대한 합리적 검토는 신앙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다 온전한 믿음을 가지는데 유용한 작업이라는 것이다.[김선하 외 4명, 『종교와 철학 사이』, 서울: 늘봄, 1996, 49]

   “Ⅲ-3” 비판적 합리주의
 이러한 관점에서 사람들은 “비판적 합리주의”를 주장한다. 이것은 “종교적 믿음들에 대한 결정적인 증명이 불가능하더라도 그러한 믿음 체계들이 합리적으로 비판되고 평가될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고 보는 관점”[라이엔바하 외, 『종교철학』, 76]이다.
 여기서 비판적 이라는 말은 두 가지 뜻을 함의한다.
1. 종교적 믿음을 단번에 참이라고 믿고 결단하기 보다는, 그 신앙 주장들에 대한 비판적 검토 작업들이 필요하다.
2. 이 “비판적” 이라는 말은 우리의 “이성”의 능력에 대해서도 비판적일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순수하고 객관적인 합리성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인데, 우리의 추론 방식과 사유 방식은 언제나 그 시대 지식 권력의 영향력 하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추구하는 합리성이 진정한 합리성인지를 물을 수 있을 때, 그 합리성은 종교의 맹목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따라서 이성을 결여한 신앙은 맹목적으로 나아가기 쉽고, 신앙을 결여한 이성은 지능적 계산의 약삭빠른 게임에 불과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신앙과 이성 모두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견제할 때” 건전성을 확보할 수 있다. 신앙과 이성은 양자택일의 이분법적 문제가 아니며, 신앙과 이성은 “비판적 동무관계”를 견지하며 함께 같은 방향을 보며 삶이라는 길을 걸어가는 관계이다. “동무”는 오랫동안 지내왔기에 익숙해져 습관이 되어버린 관계가 아닌 한 친구가 길로부터 이탈을 하거나 뒤처지면 함께 쉬던지 이끌고 가야하는 관계를 말한다.
 만약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서 선택의 문제가 발생한다면 이 둘 중 하나가 이탈을 하거나 뒤쳐진 경우일 것이다. 양자 간의 어느 한쪽만을 선택하기를 요구하거나 받는 것은 근대이래. 정착된 잘못된 이분법적 구조에 우리의 사유가 길들여진 탓일 것이다.[김선하 외 4명, 『종교와 철학 사이』, 서울: 늘봄, 1996, 47-50]



Ⅳ. 결론
 결론적으로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서 어떠한 입장에서 어떤 답을 찾을지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삶 속에서 도움이 되는 방향을 택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답을 내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생각을 해 보자면,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살아간다. 또한 인간의 모든 감정, 느낌은 분명 관계로부터 기인하고 있다.
 이렇게 살펴 볼 때에 신앙을 가짐으로써 조금은 불확실 하지만 있을수도 있는 신과의 관계성을 가지는 것이 본인의 삶에 좀더 행복으로써 다가온다면 신앙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그것이 본인의 삶에 마이너스 요소가 된다면 그에 맞게 신앙을 가지지 않으면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사유하는 과정에 있어서 우리는 비판적 합리주의의 태도로써 완벽할 수는 없지만, 최대한 객관성을 가지기 위해 “노력” 해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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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reator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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