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뱅의 자유론: 신앙과 자유의 관게에 대하여 - 윤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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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의 자유론: 신앙과 자유의 관계에 대한 합리적 이해
지도교수: 이 오 갑
신학부
윤동성
목 차
Ⅰ. 서론
Ⅱ. 자유란 무엇인가?
Ⅱ- 1. 자유의 2가지 전통
Ⅱ-1-가. 그리스 전통으로써의 자유
Ⅱ-1-나. 히브리 전통으로써의 자유
Ⅱ-2. 두 전통과 그리스도인의 자유
Ⅲ. 칼뱅의 그리스도인의 자유
Ⅲ-1. 내면적 자유
Ⅲ-2. 외면적 자유
Ⅲ-2-가. 섭리와 자유
Ⅲ-2-나. 지성과 자유
Ⅲ-2-다. 아디아포라
Ⅲ-3. 양심의 자유
Ⅲ-4. 소결론
Ⅳ. 결론
참고문헌
Ⅰ. 서론
오늘날 사회 속에서 자유는 매우 우선적 순위를 가지는 가치임을 부정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공익에 반하지 않는 한은 국가에서도 이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또한 이 자유는 본질적으로 사람의 행복과 관련되어 있다. 이 자유를 잃을 때에 사람은 고통 받고 자유 안에 있을 때에 행복으로 한 발짝 더 다가간다.
이러한 상황 속 기독교인이라면 구속의 자유라는 세상이 말하는 것과 조금은 다른 성격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기독교 신앙 속에서 삶속에 직면하는 다양한 상황 속에 자유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이것에 대해 과연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무엇이며 어떻게 누려야 하는가를 확실히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이는 이미 한국교회에서 많은 논란과 신앙의 실족이 자유에 관련된 관념으로 인해 일어난다는 사실이 반증한다. 이것은 교인들의 삶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예컨대, 흔히 일어나는 논란으로는 술을 마셔도 될 것인가, 담배를 피워도 될 것인가와 같다. 한국교회는 이것을 전통대로 해결하려 하지만 이것에 강제성을 부여하는 것에 성경을 근거로 하여서 문제가 되기도 하며, 이 자유의 문제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 특정 상황이 왔을 때 그리스도인으로써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도 결정하게 하는, 쉽게 말해 영적, 세속적 세상에 직면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삶의 근간이 된다.[박건택, “칼뱅 신학의 자유의 구조” 『신학지남』 제74권 (2007), 61]
뿐만 아니라 이 자유의 문제는 생활 영역이 아닌 내면과 신학의 영역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자유라는 논제는 복음의 성격을 드러내 주는 것으로써 이미 성서의 출애굽에서부터 언급되고 있으며, “자유”라는 단어는 성경속 54번 등장한다. 또한 종교개혁의 계기 또한 자유가 없는, 저주로써의 율법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볼 때에 자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 보아할 때 사실 개신교 교리의 핵심은 자유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으며, 성경의 출애굽을 찾아보더라도 이미 자유에 대한 사상사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전체적인 성경의 구속사는 그 구속으로써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는가를 이야기 하고 있다. 그렇기에 자유를 올바르게 알지 못하는 신앙은 소용없고 잘못된 신앙이라 말하는 것 또한 어렵지 않은 부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자유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중에서도 칼뱅의 자유론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현재 장로교회가 대부분인 한국교회의 실정상 대다수의 교회는, 그리고 교회의 트렌드는 그의 교리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재 한국교회의 실정을 보면 그의 자유론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주목조차 하고 있지 않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올바르게 조명할 때에 많은 잘못된 이해가 바로잡히고, 교회의 잘못된 문화가 바로잡힐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 뿐만 아니라 칼뱅은 개신교 신학에 기틀을 놓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의 자유론은 그저 자유에 국한된 것이 아닌 전체적인 조직신학을 염두에 두고 쓰인 자유론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칼뱅의 자유론은 기타 다른 신학적 요소 또한 감안하고 전체를 보고 연구되었다 여겨진다, 그렇다면 현대의 상황과의 괴리 또한 많지 않을 것이다. 이에 그의 자유론을 올바르게 이해할 필요성이 시사된다. 따라서 이 논문의 목적은 칼뱅의 자유론이 무엇인지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현대에서의 적용을 모색하는데 있다.
Ⅱ. 자유란 무엇인가?
먼저, 자유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자유의 의미를 정리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반적 의미로써의 자유와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다를 수밖에 없다. 라는 점을 구분 짓고 시작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구속을 전재하고, 이 두 가지 자유가 다르지 않다면 세상에 살아감에 있어 이 자유로 인한 문제가 생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유의 이념은 사실 우리 서구 문화에 그 특수한 성격을 제공한바 적어도 그것은 이 문화를 형성시키고 이 역사를 움직였으며, 그 풍요함, 저 비극과 영광을 제공해 준 주역들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차완호, “자유에 대한 바울의 이해” (신학석사학위논문, 협성대학교대학원, 2004), pp6; 불트만 『학문과 실존 3권』, pp.100에서 재인용]
이 말에서 볼 때에 일반적으로 자유는 철학에서 가장 중심적인 질문이자 원초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면 이 자유라는 것은 인간이 의지를 가지고 행동한다는 사실을 반증하며, 그 자체로 이미 삶을 살아가는 모든 언행의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자유가 무엇인지 정의내릴 바에는 그것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이 더 쉬운 것 같다”[엄정식, 자유 개념의 구조, 『철학논집』 제 9호(2005) ,pp217; E.A. Lagerak, “Freedom: Idea and Ideal”, in: Hearing and Doing. Philosophical Essays Dedicated to H. Evan Runner, J. Kraay & A. Tol (eds), Toronto, 1979, pp39 에서 재인용]라는 어떤 학자의 말처럼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자유는 개념적 파악, 또는 이론적 정의의 대상보다는 체험과 실현을 필요로 하는 어떤 근원적인 이념을 지칭한다고도 할 수 있다.[엄정식, “자유 개념의 구조”, 『철학논집』 제 9호(2005) ,pp217] 부자유에서 벗어남, 즉 억압에서의 해방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것은 정의를 내리기보다 그 역사를 고찰하는 것으로써의 이해가 더 타당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자유라는 개념은 서로 상반되는 개념에 대한 주장과 모호한 주장이 많으며, 다의적이라고 해석되기 때문에[박건택, “자유의 사상사를 위한 서론적 고찰” : 『신학지남』 제76권(2009), pp51-53] 정의한다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Ⅱ-1" 자유의 두 가지 전통
이러한 자유에는 두 가지 전통이 있다. 그리스와 히브리 전통 이다. 이 두 가지 전통은 사유의 두 뿌리이자 동시에 기독교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는 일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는 면에서 자유의 이해를 위해 언급할 필요성이 시사된다.
"Ⅱ-1-가". 그리스 전통으로써의 자유
그리스 전통의 자유는 두 가지 특성을 지니는데 그리스 문명이 오리엔트의 지배세력에 맞선 일종의 자유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고통스런 경험에 대해 상대적인 의미로써 형성되었다고 보인다.
첫째로, 자기 동족과 고향 땅에 머물러 있는 귀속성을 말한다. 즉 자유의 반대는 외로운 나그네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엄정식, “자유 개념의 구조”, 『철학논집』 제 9호(2005) , pp218-223]
둘째는, 운명, 필연성, 우연과 같은 벗어날 수 없는 무언가에 도전하는 상태 인간이 확보할 수 있는 활동의 공간 이라고 한다.[Ibid]
즉, 벗어날 수는 없지만 인간의 활동 무대는 있는 상태, 자율적으로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볼 때에 그들은 안정된 삶을 살면서 동시에 삶에 고통으로 다가오는 요소가 있을 때에 그것에 대한 반동으로써 자유를 정의했던 것 같다.
또한, 그들에게 이 두 가지 의미로 볼 때에 자연이란 질서는 매우 큰 것으로써, 자신들이 저항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으며 동시에 그들에게 유일한 것을 주는 것이었고, 자신들의 고향이라 바라봤기에 자연이란 것은 그들에게 유일하게 자유에 대한 것을 정해주는 자유를 위해 머물러야 할 대상으로써, 이것을 어느 정도 제어하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자유의 사상이었다.
"Ⅱ-1-나". 히브리 전통으로써의 자유
다음으로 히브리 전통의 경우 가장 크게 이 자유를 출애굽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히브리 전통에서의 자유는 이와 다르게 바로 예전 것을 부수고 혁신하는 개혁을 의미한다.[엄정식, “자유 개념의 구조”, 『철학논집』 제 9호(2005) , pp224-225] 즉 억압하는 질서를 깨트리고 새로운 질서를 내다보는 것을 자유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들의 자유의 특장은 세 가지로 요약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유는 출생이나 교육을 통한 일정한 상태가 아닌 역사적 사건이자, 과정이다. 구약의 출애굽 사건은 기존의 억압된 상황에서 새로운 자유의 질서를 창조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을 통해 정의와 평화를 근간으로 하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러한 면에서 자유는 구체적인 역사 공동체에서 체험되고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Ibid]
둘째, 이 전통에서의 자유는 “부정적”자유와 “긍정적”자유가 두드러진다. 이것은 부정적인 것으로부터의 해방으로의 자유와 그 자유에 머무르지 않고 무엇을 위한 자유로 나아가는 긍정적 자유를 뜻한다. 여기서 부정적 자유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만 긍정적 자유는 사랑과 책임적인 삶을 위한 자유이다. 즉 자유 속에서 신앙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Ibid]
셋째, 이 전통에서는 자유를 하나님의 의지적 행위, 즉 하나님의 계명을 통해 경험한 것을 자유로 보고 있다, 그렇기에 이 자유는 자율이 아닌 타율적인 자유라 할 수 있으며, 어떠한 법아래서 그와 더불어 얻어지는 자유이다. 그렇기에 여기에서는 필연성, 우연성은 존재하지 않으면서 한편으로는 근대적 의미의 자유와 대조를 보인다. [Ibid]
"Ⅱ-1-2". 두 가지 전통과 그리스도인의 자유
이 두 가지 전통과 근대적 자유사상은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는데, 그것은 바로 자유의 근원적 의미라 할 수 있는 우주적 질서에 머물러 있을 때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엄정식, “자유 개념의 구조”, 『철학논집』 제 9호(2005) , 227] 이것은 현대에 와서의 일반적 자유와는 조금 의미가 다르지만 고통에서의 해방, 자신이 원하는 것의 성취, 행복에 가까이 다가감 이라는 면에서는 목표가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와도 일치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지에 머물러 있을 때에 자유할 수 있다는 구속사적 자유인 것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전 4:17)”
이 구절에서 볼 수 있듯 그리스도교에는 자유가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또한 자유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이 자유라는 것 자체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이고, 결론적으로 행복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 의지의 근간이 된다고 할 수 있다.’[김익만, “어거스틴의 자유의지론 연구: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을 중심으로” (신학석사학위논문, 총신대학교대학원, 2010) pp44-53]
이 점에서 미루어 볼 때 이 행복이란 궁극적으로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이자 목표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에 대한 해답을 기독교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현대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유의 문제에서 괴리가 생기게 된다. 왜냐하면 목표가 같을지라도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 방법론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그 사이에 오는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 자유는 한편으로는 선택에 있어 강요받지 않을 권리를 이야기 하는데, 이것은 말 그대로 인간이 각기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선택을 모습을 볼 때에 우리는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 자유가 행복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볼 때에 그것은 본인이 틀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이 다름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결정적으로 말하자면 목적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과 도달할 수 없는 방법 간의 차이는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다름과 선택이라는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것을 어느 정도 포괄적이게 나마 한정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앞서 말했듯, 이 자유라는 것은 선택을 할 수 있게 해주는데, 이 선택에 따라 그 결과는 달라진다, 선택이 있기에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선택자에게 찾아오며, 그 책임에 따라 우리는 불행을 느끼기도 하고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의지는 행복을 원하고 있으며 매 순간 선택을 하는 이유는 좀 더 행복하기를 원하는 지향성 때문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자유라는 것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 주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에 자유라는 것은 행복을 위한 도구이며 온전한 자유는 그 자유가 행복을 향하고 있는 상태라 할 수 있다.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이 아닌” 인간은 자유를 남용하기 때문에 절대 그 행복에 도달하지도, 방향을 유지하지도 못한다. 그 이유는 어거스틴에 따르면 인간은 행복의 대상인 하나님을 향유하기 보다는 일시적이고 상실되는 것에 집착하여 사랑을 저급하게 만들었고, 이 원죄의 영향 하에 있는 이상 이 자유를 사용하는 의지, 자유의지는 온전하지 않기 때문이다.[김익만, “어거스틴의 자유의지론 연구: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을 중심으로” (신학석사학위논문, 총신대학교대학원, 2010) pp51-53]그렇기에 이 왜곡된 자유의지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 원천인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이것을 칼뱅이 인용하여 한발 더 나아가 설명하는데, 칼뱅에 따르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죄를 짓게 되어있다. 즉 불행을 불러오는 선택을 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의지가 “과도한 미친 욕망으로” 죄악에 빠져 정복되었고[이오갑, 칼뱅의 인간 121-124], 필연적으로 악을 행하게 된다는 것이다.[박건택, 『칼뱅의 자유사상』 (서울: 솔로몬, 2013), pp76]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죄로 인한 병으로써[이오갑, 칼뱅의 인간, 141-145] 성령의 은총의 힘에 의해 이 자유의지는 다시 회복되어 하나님의 의를 실현하게 된다.[박건택, 『칼뱅의 자유사상』 (서울: 솔로몬, 2013), pp76] 즉, 하나님의 구속 안에 있지 않는 이상 그 지향성이 저절로 악을 향하고 그 결과로써 불행을 불러온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이 의지라는 것이 저절로 악을 향하게 되어있다 필연적이라는 것은 선택을 할 수 없다.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의지에 의해 실현되는 선택은 실질적으로는 자유롭지 못하다고 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죄에 빠지게 된다.
정리하자면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써, 구속으로써의 자유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이 행복은 선에 대한 대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김익만, “어거스틴의 자유의지론 연구: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을 중심으로” (신학석사학위논문, 총신대학교대학원, 2010) pp51-53]온전한 선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의지에 머물러 있을 때, 또한 선택을 함에 있어서 그분을 생각하고 그분의 은혜의 도움을 받을 때에 비로소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 앞으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논할 때에 이 자유라는 단어를 이해함에 있어 “그리스도인이 자유를 사용하는 법”을 모색한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유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로써의 “도구”이며, 우리가 연구해야하며 필요한 것은 “자유” 가 아닌 “자유를 사용하는 방법“, 어떤 선택이 옳은 선택인가? 즉,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하는가? 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자유를 과연 개신교 신학의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받는 칼뱅은 과연 어떻게 언급하였는지 알아보고 우리 삶속에서 부딪히는 문제에 적용할 필요가 있겠다.
Ⅲ. 칼뱅의 그리스도인의 자유
칼뱅은 기독교 강요에서 복음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 바로 자유라고 언급하면서 이 자유의 중요성을 신중히 언급한다. 기독교 강요를 살펴보면 먼저 12장에 “그리스도인의 자유” 라는 장으로 자유가 등장한다. 여기서 자유는 세 가지로 요약되지만, 그의 기독교 강요 전면에 이 자유가 조금씩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자유를 외면적 자유와 내면적 자유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내면적 자유는 칭의론에 기초하고 있으며, 외면적 자유론은 성화론에 기초하고 있다.[홍원표, “칼뱅의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연구 『기독교 강요』를 중심으로” (신학석사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교대학원, 2004) 42-43]
"Ⅲ-1"내면적 자유
칼뱅의 내면적 자유는 복음의 핵심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칭의와 연결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이것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로부터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의롭다 하심은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이 없으며 처음부터 끝가지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의해 칭의가 주어진다.“[Jean calvin. 『기독교 강요: 中』.원광민 역. (경기: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004), 396]
오직 긍휼에 의한 칭의로 의가 주어지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가 자유를 사용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율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지 말고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보아야 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이 율법의 중요성 또한 강조하여 이야기 한다. 그 이유는 이 율법의 용법에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의롭다 하심은 율법과 상관없지만, 그럼에도 율법은 계속해서 우리를 가르치고 권면하여 선을 행하도록 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무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함으로, 순결과 거룩을 추구하게 하는 것.”[Ibid, 397]
우리 자신의 죄를 알게 하고 용서를 구하게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 의를 가르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 칼뱅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두고 대립성을 말하면서도 연속선상에서 볼 때에는 복음의 우위성을 말하고 있다. 그와 함께 칼뱅은 이 율법에서 자유를 입었기 때문에 율법에 기꺼이 자유로써 진정으로 순종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종에서 아들로써 신세가 변화와 같다. 율법의 멍에에 매여 있는 자들은 마치 날마다 주인에게 해야 할 과제를 부과 받는 종들과 같다 이것을 이행치 못했다면 주인 앞에 나서지 못할 것이나 ……. 아들의 경우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아들들에 대해서는 부모가 좀 더 너그럽고 자유롭게 대한다.……. 그대로 부모 앞에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부모가 원한 만큼은 아닐지라도 자기들의 마음의 헌신을 부모가 받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Jean calvin. 『기독교 강요: 中』.원광민 역. (경기: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004), 401]
이것은 양심의 자유로써 율법을 행할 때에 마음의 헌신으로써 자발적으로, 자유의 사용에 의한 선택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받아주실 것이라는 확신과 진심이 필요한 것으로써 강압이 아닌 자유의 사용을 통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으며, 칼뱅은 이것이 그리스도인들로의 삶으로 드러나는 내면적 자유라고 이야기 한다.
왜냐하면 앞서 말하듯 자유를 사용하는 그 의지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악을 행하게 되어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은 이상 필연적으로 악을 행하게 될 것이다.[이오갑, 『칼뱅의 신과 세계』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0) 307-311] 하지만 은혜를 입었다면 그 의지가 자발적으로 선을 추구하게 되고, 그것이 진정으로 율법을 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이 내면적 자유는 선행, 율법, 도덕으로부터의 해방과 함께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칼뱅은 궁극적으로 행복을 향한, 하나님 앞에서의 의는 은혜에서 오며, 선한 행위를 한다고 해도 이것이 행위로부터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이 칭의와 대립되는 공로개념, 즉 구원의 근거가 되는 행위들을 거부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홍원표, “칼뱅의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연구 『기독교 강요』를 중심으로” (신학석사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교대학원, 2004), 62-64]
행함으로는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 얻을 수 있고, 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 또한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만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내면적 자유가 복음의 핵심이며 이 내면적 자유가 이루어 질 때에 비로소 “온전한 자유”로써의 선택이 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칼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다. 바로 억지로 율법을 지킴으로써는 이의를 얻을 수 없고 오히려 율법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율법, 전통, 공로와 같은 것들을 내려놓고 오로지 하나님의 긍휼, 은혜에 힘입을 때에 비로소 이 칭의를 받고 내면적 자유로써 그 율법 안에 있는 행위들도 진정으로 “선”을 향한 “온전한 자유”로써 행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내면적 자유는 자연스럽게 그 자유로 인한 “행함”, 외면적 자유 즉, 성화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Ⅲ-2"외면적 자유
이 외면적 자유는 주로 그 자체로써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행위, 흔히 아디아포라 라고 불리는 행위들과 관련한다, 칼뱅은 이 자유에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바로 이 외면적 자유가 내면적 자유를 얻은 자들이 삶 속에서 온전한 자유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대체로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섭리와 자유, 지성과 자유, 그리고 아디아포라이다.
"Ⅲ-2-가". 섭리와 자유
이 문제에 대해 칼뱅의 입장을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지적할 점이 있다. 그것은 이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행동들”이 완전히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도 윤리적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어떤 행동을 선택할 때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있기 때문이다.[Ibid, 65]
“우리가 충동을 받아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선택하고 의지가 그 쪽으로 기울어지든, 혹은 반대로 우리에게 해가 될 일을 우리의 지성과 마음이 삼가든, 그때마다 언제나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가 거기에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가 어디까지 개입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미리 보시기에 유익한 쪽으로 일들이 일어나도록 하실 뿐 아니라, 사람들의 의지도 역시 같은 쪽으로 기울어지게 하시는 것이다.”[Ibid, 65에서 재인용]
이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인간에 적용되는 것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섭리에 길을 열고자 하시면, 인간의 의지를 그의 뜻대로 바꾸신다. 따라서 인간의 눈에 자유롭게 비치는 행위 또한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게 된다.[Ibid, 67] 이 점에서 인간의 자유행동은 외적 사건보다 내면의 선을 향한 자유의지와 관련된다고 할 수 있겠다.
"Ⅲ-2-나". 지성과 자유
칼뱅은 인간의 지성을 말하면서 윤리적 영역을 언급한다. 그에 따르면 지성의 활동은 하늘의 것과도 관계될 수 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땅의 것과 관련된다. 여기서 “진정한 정의의 규칙 및 근거와 하늘나라의 신비”라고 부르는 것,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한 지식, 우리의 삶을 이 뜻에 부합시키는 규칙”은 하늘의 것과 관계된 것이며, 정치이론, 법, 공예, 철학, 자유 교양이라고 부르는 과목들은 땅의 것과 관계된 것이다.[박건택, “칼뱅의 기독교 강요에 따른 그리스도인의 자유”, 『신학지남』 제62권 (1995), 72-73]
칼뱅에 따르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으로, 사회를 보전하려는 본능적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이 지성은 주로 땅의 것과 관련하여 활동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에서 칼뱅은 진리 추구의 자유를 인정은 하지만 인간 지성의 자유가 진리에 접근치 못하며 진리를 목표로 삼지 않다는 점을 들어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 지성의 자유로운 활동은 하나님의 영광과 순수한 복음을 위해 쓰여야 하고, 또한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허락하신 인문 과학이었기 때문이다. 즉, 허락된 것이나 남용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이것은 칼뱅의 배경에 인문학이 깔린 것 또한 영향이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박건택, “칼뱅의 기독교 강요에 따른 그리스도인의 자유”, 『신학지남』 제62권 (1995) ,74-75]
"Ⅲ-2-다". 아디아포라
외면적 자유로써 아디아포라는 칼뱅에게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자유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부터의 자유로써 칼뱅은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것들은 남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 허용되지 않은 것이 아니기에 이것에 얽매이는 것 또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Emile Doumergue. 『칼뱅 사상의 성격과 구조』. 이오갑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5), 90]
“기쁨, 쾌락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 앞에 합당치 못하다고 생각하면, 그 다음에는 사소한 기쁨조차 누리지 못하게 되고 끝내는 기쁨이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런 식이다 보면 길을 걷다가 지푸라기 하나만 밟아도 큰 범죄로 생각하는 우에 빠지게 될 것이다.“[Jean calvin. 『기독교 강요: 中』.원광민 역. (경기: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004), pp402]
여기서 칼뱅은 수도원적 금욕주의를 일종의 “미끄러지게 하는 오류”이자 “끝없는 미궁” 이라고 표현하며 거기에 발을 들여놓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고 말한다.[Emile Doumergue. 『칼뱅 사상의 성격과 구조』. 이오갑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5), 93]
하지만 언급했듯,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 면에서 칼뱅은 이것에도 제약을 걸어 놓는다. 무절제해서는 안 되며, 경계해야하고, 욕망을 절제해야하며, 이웃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각기 하나님에게서 받은 방식에 따라 자신의 소명의 한계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박건택, “칼뱅의 기독교 강요에 따른 그리스도인의 자유”, 『신학지남』 제62권 (1995), 77]
하지만 어디까지 얼마나 절제해야 하며, 경계하고 어디까지가 자신의 소명인 것인가? 남용하지 않으면서도 허락된 은총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누리는 것, 이것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에 대해 칼뱅은 기독교 강요에서 “양심”이라는 존재를 계속해서 함께 이야기한다. 이 “양심”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이 자유에 대해 우리를 통재하고, 우리를 가르치며, 우리 행동에 있어 원동력을 부여하는 존재로써 하나님과 사람간의 중간적 존재로 대두된다.
"Ⅲ-3"양심의 자유
칼뱅의 신학에서 이 양심이란 단어는 매우 중요한데, 내, 외적 자유에 있어서 이 양심이 무엇을 행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며, 결론적으로 무엇인가를 해도 되는가? 라는 것은 이 내적 자유로부터 기인하기 때문이다.
“이 단어의 정의는 그 어원에서 찾을 수 있다. 정신과 지성을 통하여 어떤 사물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때에 그것을 가리켜 아는 것(to now)이라고 하며 여기서 지식(knowledge)혹은 학(science)이라는 용어가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지각을 가져서 그것을 증인이 되어 죄를 숨기지 못하도록 만들고, 오히려 그들을 하나님의 법정 앞에 죄인으로 끌어다 놓을 때에, 그 지각을 일컬어 양심(conscience)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양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양심이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살아있는 성향이며, 경건함과 거룩함으로 살기를 바라는 순전한 열심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이 양심은 선한 양심의 열매가 사람들에게까지 다가가기에 사람들 간의 관계에 적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양심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Jean calvin. 『기독교 강요: 中』.원광민 역. (경기: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004) 413]
칼뱅에 따르면 이것을 거스르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것이 그 자체로는 악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양심을 거스른다면 행하거나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무엇이든 믿음으로 쫓아 하지 않는 것은 죄이기 때문이다.(롬 14:23) 그래서 칼뱅은 이 자유를 아는 자만이 양심의 평안, 즉 양심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릴 수가 있다고 말한다.[박건택, “칼뱅의 기독교 강요에 따른 그리스도인의 자유”, 『신학지남』 제62권 (1995), 75-77]
양심의 자유를 유지하는 문제는 그 자체가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은 사물을 대할 때 특히 첨예하며, 우리는 그것을 자유롭게 누리거나 부인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다른 무엇인가에 내 양심을 구속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유를 주신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한 짐을 스스로 지워서도 안 될 것이다.[홍원표, “칼뱅의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연구 『기독교 강요』를 중심으로” (신학석사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교대학원, 2004), pp69]
칼뱅에 의하면 이 자유는 양심에 관계된 것이고 하나님 앞에 근거가 있고, 양심에 불안이 없다면 이 자유를 해도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자유를 자신의 정욕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닌 덕을 세우는 방향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자유를 스스로 사용하지 않는 자유를 가짐으로써 사랑을 실천해야한다는 것이다.
“믿음이 연약한 형제들에게 상처를 주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으로써 주어진 자유가 아니기에 모든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을 섬겨야 마땅하다. 우리에게 자유가 주어진 것은 오히려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며, 사람들 가운데서도 화평을 이루고 살기 위함이기 때문이다.”[Jean calvin. 『기독교 강요: 中』.원광민 역. (경기: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004), 408]
한편으로 이 자유를 사용해야 할 때도 있음을 칼뱅은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억압받을 때다.
“디도의 경우 할례 베풀기를 강력히 거부하는데, 갈2:3-5를 참조하면 이것이 거짓 사도들의 부당한 요구로 인해 믿음이 연약한 형제들의 자유가 위협받자 이 자유를 분명히 보이기 위하였음을 알 수 있다.”[Jean calvin. 『기독교 강요: 中』.원광민 역. (경기: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004), 409]
한편으로 이 양심의 자유와 법과의 관계도 언급하는데 그것은 바로 두 가지의 통치로써 하나는 영적인 통치 하나는 법적인 통치이다. 이 두 가지 통치는 목표는 같다고 할 수 있지만, 그 방법과 적용이 전혀 다름으로써 이것은 마치 율법과 칭의 사이의 그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가지가 구분되지만 어느 한 쪽으로 인하여 나머지 한 쪽을 무시해서는 안 되고 한 쪽이 한 쪽의 영역을 침투해서도 안 된다.[이오갑, “법의 신학문제 –칼뱅을 중심으로-” 『기독교언어문화논집』 제2권(1998), 262-266] 세상의 법과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자유롭다 해서 육적으로 해방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Ⅲ-4"소결론
정리하자면 칼뱅은 외면적 자유 또한 내면적 자유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이 자유에서는 양심이라는 존재가 우리의 몽학선생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양심은 다른 그 무엇에도 구속되어서는 안 되며, 오로지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으로써 유지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올바른 양심에서 올바른 자유가, 열매로써의 올바른 행위가 나온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 있을 때에 온전한 자유, 온전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칼뱅은 진정한 믿음이 있다면 진정한 덕이 있으며, 여기서 제대로 된 선행[Jean Cadier,『칼뱅, 하나님이 길들인 사람』. 이오갑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5), 205]이 나올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내면적 자유, 외면적 자유 이 모든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 구속 사역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하였듯, 우리의 자유의지는 원죄 이후 악에 정복되어 하나님의 은총이 없는 이상, 그것이 율법을 통한 것이든, 지성을 통한 것이든 아무리 선한 행위를 한다고 하여도 이미 그 지향성은 죄를 향하고 있으며 그 결과는 불행, 죄의 값인 사망을 향한다는 것이다.
이 의지가 온전히 하나님께 구속 될 때에, 즉 진정한 믿음이 있을 때에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이 생기고 여기서 제대로 된 선행, 즉 진정한 자유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Ⅳ. 결론
일반적으로 우리가 교회 안에서 또는 일상 속에서 흔히 겪는 문제는 바로 관계에서 온다. 아니 모든 문제는 관계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 주변 사람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그 모든 문제는 이 관계성에서 문제가 생겨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때로는 우리를 억압하게 되며, 이 관계가 원만할 때에 비로소 그 관계 속에 자유라는 것을 얻게 된다. 본질적으로 이 관계에 문제가 생길 때에는 “죄” 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이 사이에 끼어들 때 생기게 된다. 하나님과 사람사이도 이 “죄” 때문에 멀어지며, 사람과 사람사이도 기본적으로 이 “죄” 때문에 멀어진다. 이 죄라는 것은 쉽게만 예를 들어도 우리는 기본적으로 누군가를 만날 때에 조금식이라도 자기 자신을 포장하는 “거짓의 장막”을 관계 안에 두게 된다. 이미 그로써 그 관계에 문제가 생길 여지를 두는 것이다.
우리는 원죄를 가지게 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고, 그에 따라 악을 향한 지향성으로써의 자유라는 것을 가지게 되었다.
이 자유로 우리 맘대로 하고자 할 때에 모든 관계에 문제를 일으킨다. 바로 자신의 입맛에 맞도록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기도 하며, 쉽게 상처를 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맞추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자신의 입맛에 맞는 하나님을 구하고 때로는 그 하나님을 정당화에 쓰기도 한다. 사람간의 관계에서는 자신과 가까운 사람, 쉽게 예를 들어 부부싸움도 이 악을 향한 지향성으로써의 자유에서 시작된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너무나도 쉽게 상처를 주는 것이다.
필자는 이것이 큰 문제라고 본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많은 마찰들이 성경의 율법에 기반하고 있을 때와, 개인의 선입견 또는 사랑이 없는 마음에서 일어난다.
이것에 대한 해결책으로 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명언, “본질의 일치를 비본질에 자유를 모든 것에 사랑으로“ 라는 것을 해결책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본질의 일치를 비본질에 자유를 모든 것에 사랑으로. 필자는 이 말이 이미 기독교의 본질을 최대한 압축시켜 이야기하고 있다고 본다. 과연 우리가 모든 문제를 대함에 있어서 진정으로 사랑으로 대했다면, 비본질에 치중하지 않았다면 교회 안에서, 그리고 신자로써 세상과의 대면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겼을까? 문제가 생겼다고 한들 과연 그 문제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을까? 라는 물음을 가지게 된다.
칼뱅의 자유론에서 알 수 있듯, 진정한 믿음에서 진정한 사랑이 생기고, 여기서 진정한 선행이 나오며 율법을 통해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 때로 문제가 생길 때에는 가장 기본적인 것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것이라 여겨진다.
우리가 항상 어떤 행동을 하기에 앞서 본질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을 향한 지향성을 잃지 않고, 이외의 다른 율법과 같은 외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자유를 두고, 모든 것에 대해 오로지 덕을 세우기 위함, 사랑으로 대한다면 이 자유에 대한 오해로 생기는 문제, 마찰과 함께, 인간 내면의 고통에서의 자유 또한 가져다 줄 것이라고 본다.
즉 다른 그 무엇도 아닌 먼저 본질의 일치, 오로지 그리스도를 통한 긍휼에 의지하는 진정한 믿음이 필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내면적으로는 사랑, 외면적으로는 정의,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칭의, 그리고 인간의 하나님을 향할 수 있는 필연적 범죄로부터의 자유, 즉 진정한 자유로써의 자유의지를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없으며,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며, 이것의 시작이 바로 그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외에 다른 것은 자유, 그리고 사랑으로 대하면 될 것이다. 우리의 의를 내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참고 문헌
국내서적
박건택, 『칼뱅의 자유사상』 (서울: 솔로몬, 2013)
이오갑. 『칼뱅의 신과 세계』(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0)
『칼뱅의 인간』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2)
번역서적
Emile Doumergue. 『칼뱅 사상의 성격과 구조』. 이오갑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5)
Jean Cadier,『칼뱅, 하나님이 길들인 사람』. 이오갑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5)
Jean calvin. 『기독교 강요: 中』.원광민 역. (경기: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004)
논문
김익만, “어거스틴의 자유의지론 연구: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을 중심으로” (신학석사학위논문, 총신대학교대학원, 2010)
박건택, “칼뱅 신학의 자유의 구조”. 『신학지남』 제74권 (2007) pp.55-72,
"" “칼뱅의 기독교 강요에 따른 그리스도인의 자유”. 『신학지남』 제62권 (1995) 58-100 (43 pages)
"" “자유의 사상사를 위한 서론적 고찰” : 『신학지남』 제76권(2009)
<!--[endif]-->엄정식, “자유 개념의 구조”. 『철학논집』 제 9호(2005) pp218-240
이오갑, “법의 신학문제 –칼뱅을 중심으로-” 『기독교언어문화논집』 제2권(1998), 256-280
이진일, “마틴 루터와 요한 칼뱅의 그리스도인의 자유 개념 비교” = Theology of Christian Liberty by Martin Luther and John Calvin (신학석사학위논문,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대학원, 2002)
차완호, “자유에 대한 바울의 이해” (신학석사학위논문, 협성대학교대학원, 2004)
홍원표, “칼뱅의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연구 『기독교 강요』를 중심으로” (신학석사 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교대학원,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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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reator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