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헌법

 

: 6:9

6: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6:10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 22:34~40

22: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22: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22: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 13:34-35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얼마전 cbs에에서 신천지에 빠진 사람들 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하여 논란이 되었습니다.

물론 사이비가 괜히 사이비가 아닌만큼 신천지 측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반론을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방송에 나온 부분은 소수의 경우이며, 오히려 개종교육이라며 신천지 신차를 개신교 측에서 잡아가 감금하는 사태 또한 있다는 말이였습니다.

예전부터 뉴스를 보면 몇몇 과격한 종교인들이나, 또는 집단성으로 문제가 일어나는 기사들이 간간히 일어나 왔습니다. 때로는 사명이라며 국보급 사찰에 찾아가 훼손을 하기도 하는 경우가 있고,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간간히 정도가 지나쳐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거나 공해라고 할만큼 과격하게 전도를 하는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쉽게 볼수 있는 모습뿐 아니라 이미 역사만을 살펴보아도 종교에 대한 생각 차이로 인한 과오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슬람과 기독교 간에도 십자군 전쟁이 있었으며, , 구교 간에도 신의 심판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죽이는 일들이 자행되던 때도 있었습니다. 또한 국 내외 만 봐도 각 종파끼리 이단심판을 하기도 했으며, 종교의 미명하에 인륜을 저버리는 일 또한 많이 자행되어왔습니다.

물론 현대에 있어서는 이러한 일까지는 일어나지 않지만 그래도 역시 곳곳에서 분쟁이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분쟁에 대해 종교에 대해 비관적인 무신론자들, 또는 분쟁중인 다른 소속의 사람들이 서로 말하는 것을 들어보자면, 그쪽의 신자들은 진짜 하나님의 말씀은 그게 아니다, 회개하면 그만이냐, 이미 구원받았으니 끝이냐, 또는 왜 생각도 없는데 강요를 하느냐 등의 이야기를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그 요지를 정리해보면, 각종 범죄의 온상이다, 이렇게 분쟁하고 싸우는 것이 종교냐, 않좋은게 많다. 따라서 거긴 맞지 않고 우리가 맞다, 라는 식의 논리를 펴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느냐? 그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각자가 다르지만 그들이 하는 말은 틀리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정리해보면 모든 종교는 맞다 다만 진리이냐가 문제일 뿐이다. 라는 결론에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이런 모습을 제 3자의 입장에서 보고있자면 무신론자들의 주장이 가장 신빙성있어 보이기까지도 합니다.

분명 성경은 우리에게 분쟁하라고 가르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일들이 어째서 일어나는 것일까요.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하고는 합니다. 예수의 가르침이 명확하지 않다, 또는 해석하기 나름이다, 자기 좋을대로 해석한다. 저쪽이 틀린 주장을 하는 것이다.

각기 그들의 입장에서 들어보면 전부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느 쪽의 말을 들어야 할까요? 과연 종교로 인한 분쟁이 없어지기는 할지라는 의문까지도 생기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분쟁은 우리가 성경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분명 성경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려다 보니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고 따라서 맥락과 상황에 따라 어느정도 그것을 현실에 풀어내는 것이 달라지는 법이죠, 그것에는 분명한 상반되는 가치 또한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도 분명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그것도 가장 우선적으로 있는 가치가 있습니다. 이 가치를 분명히 상기한다면 이런 분쟁들은 일어나서도, 일어날 수도 없습니다.

법을 집행 할 때에 보면 법간의 상하관계와 판례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떠한 단체의 규약을 보아도 규약이 있고, 시행세칙이 있습니다.

성경을 법에 비유해보자면 법을 보아도 헌법이 있고 그 아래에 민법과 형법 등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법, 또는 특수 법 들은 서로 추구하는 바가 다르기에 법간의 차이가 있을수 있는데 이것이 법에서는 분명히 상위법을 거스르지 않는 쪽으로 집행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헌법보다 아래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헌법을 어기게 되는, 본질보다 비본질에 충실하는, 우선순위를 잘못 판단하는 일이 간간히 일어나고는 합니다. 이 연장선에서 바로 분쟁,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지요.

 

따라서 오늘은 그리스도인이 지켜야할 가장 본질적인 것, 헌법이라고 말할수 있는, 하나님이 역사를 통해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셨고, 그 계획의 화룡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께서 오셔서 희생으로 완성시킨 그리스도인의 헌법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기독교 = 사랑

가장 신본적이면서도 가장 인본적인 종교인 기독교의 정수는 바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사랑 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만큼 사랑이 없는 기독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 누군가가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은 중요하고 우리의 사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게 하는 것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이 주시하는 것은 바로 그가 정말 예수의 사람인가, 주변을 돌아보는가,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는가입니다.

 

또한 율법의 본뜻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장 십계명을 살펴 보아도 사랑한다면 거짓말도 하지 않을것이고, 해치지도 않으며, 탐내지도 아니할 것이고, 이것은 오늘의 본문 마태복음 2240절에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나타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은 사랑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며 제일 또한 사랑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에서도 하나님은 곧 사랑이라고 얘기하고 있으며, 마태복음에서 하나님은 선인, 악인 상관없이 다 사랑하시고 특별히 나누시지도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이 사랑을 가장 앞서 생각한다면, 십자군 전쟁도, 이단심판도, 마녀사냥도, 또한 흔하디 흔한 분쟁들이 일어났으며,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람으로하여금 화평치 못하게 하는 과격한 행동이 일어났을까요?

그것들은 모두 이 기독교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을 우선하지 않았기에, 본질보다 비본질에 치중했기에 일어난 분쟁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분쟁, 관계라는 점에서 종교인간의 의견대립을 떠나 새새한 일상에까지도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 관계의 회복 또한도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뤄진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것을 정확히 알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이며 왜 해야 하는가?

 

과연 그렇다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은 무엇이며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은 먼저 창세부터 예수의 십자가 사건까지 과연 하나님이 우리게 무엇을 가르치기 위해 역사하셨는가를 살펴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구약은 대체로 하나님의 사랑과 징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우리는 유명한 원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됩니다.

이로인해 인간은 강포해짐을 통해 일종의 악을 향하는 지향성, 방향성, 이끌림을 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한 영향력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장 일상에서만 살펴봐도 남편이 치약을 밑에서부터 짜 쓰지 않는다고 부부싸움을 하게 되는 경우도 볼 수 있는데, 이 강포함으로 인해 타인을 제압하고 자기 자신에게 맞추려하는 악한 성향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과의 단절의 결과를 살펴보면 고통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생기게 됩니다. 이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화평이 없어짐으로 사람과의 관계가 틀어지는 것, 그리고 원하는 것을 소유하려하지만 원하는대로 되지 않는 소유의 고통입니다.

또한 에덴 동산에서 쫒겨났다 라는것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에덴을 번역하면 우리말로 기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기쁨을 잃어버리고 동산에서의 쫒겨남 즉,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사라짐으로 불안과 걱정을 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회복하기위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필요함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며, 이것의 시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기에 하나님은 구약에서 계속해서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앞서 말했듯이 구약의 율법을 통해 너희가 최소한 이것만이라도 지키며 살라며 율법의 조항을 통해서도 알려주시기도 하고, 서로간에 사랑을 못하게 하는 악을 행할때에는 징벌하심으로 나타내며, 또한 인도함으로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나타냅니다.

 

이것을 신약에 와서 예수의 희생으로 완성시키시는데, 이것으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구약의 조항을 지키는, 즉 연애로 치면 계약연애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온전한 사랑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른 것에 쉽게 비유를 하자면 마치 구약까지는 문제가 있으면 그 답을 알려주시는, 우리의 무지를 위해 1+12, 2+35라는 것을 직접 알려주시고 계셨다면, 신약에서 비로소 구약을 통해 알려주셨던 것을 기반으로 바로 이 더하기의 알고리즘, 원리 자체를 이해시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예수의 죽음으로써 나타나는데, 예수의 희생으로 하나님은 그동안 무서운, 계시되지 않은 하나님에서 다시하시는, 인간을위해 희생하시는, 인간과 함께하기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십니다.

 

이를 정리해보면 성경을 관통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시기 위해 애쓰고 인간과 함께하기위해 애쓰는 것이 기록되어있다는 점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구약을 통해 어린아이에게 일일이 알려주셨다면 신약에서 예수님의 희생, 하나님 스스로의 희생을 통해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고,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인간에게 알려주시고 또한 양보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되었기에 이 사랑이라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을 원하고, 추구하게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얼마든지 다른 종교도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고 이렇게 앎에도 우리는 사랑을 쉽게 실천하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떻게 해야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마태복음의 산상수훈, 요한복음 13~17장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바로 주님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과 소금이기에 우리 가운데의 빛, 짠맛을 잃어버리는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 우리안에 예수를 모시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은혜를 공급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앞서말한 사랑을 이해할 수는 있을지라도 그것은 분명 사람이 하는 것이기에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율법과 바리세인을 보면 알 수 있듯 보상을 바라고, 외식하고, 참았기 때문입니다. 분명 사람의 힘으로 사랑을 하면 그 끝이 좋지 않거나 어떠한 보상, 또는 목적을 바라고 하는 행위에 불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운대에 있을때에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을 할 수 있게되며, 그 부산물로써 자연스래 평안이 찾아오며 화평이 찾아오고, 성령의 열매들을 맺을 수 있게 됩니다. 진정으로 해방되고 행복에 한걸음 더 가까워진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것또한 원한다고 하여 맘대로,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하기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있는데, 요한복음 13~17장과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을 살펴보면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바로 이 사랑을 시작하게 되는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의 시작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은 바로 예수를 아는 것, 즉 우리의 죄인됨, 무력과 예수님의 희생, 사랑하심, 우리의 발을 씻으심을 고백하고 우리안에 모심으로써 시작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 자체를 고백하고 우리안에 모심으로써 이 모든 것이 시작된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예수께서는 자신의 피와 살을 먹으라 라고까지 말씀하시며 강조하십니다.

 

이렇게 되어 예수와 하나가 될 때에 우리는 포도나무가지와 같이 저절로 사랑을 공급받고,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의 9열매 또한 맺을수 있게, 맺어지게 될 것이며, 또한 화평케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이며, 진리라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랑을 온전히 이해하고 나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즉 믿음으로 시작해 사랑을 온전히 알고, 행함으로 하나님과 인간과 함께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경속 하나님의 헌법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 안에서 우리의 많은 문제, 분쟁이 해결될 것이고 평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랑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온전할 때에, 이 사랑을 깨달을 때에 비로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기에, 우리가 정말로 알기에 힘쓰고 중요하게 생각해야할 것은 사랑이 바로 본질이자 진리라는 점입니다.

이것을 본질로 놓고 생각한다면 기독교에서 종교의 미명을 쓰고 자행되어왔던 모든 실수라던지 과격한 행동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또한 때때로 필요한 어려운 결단이라던지, 체벌 또한 정말로 좋은 방향으로 결정하고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본질의 일치 비본질의 자유, 모든 것에 사랑으로. 어거스틴이 한 말이기도 하며 그리스도대학교의 교육이념이기도 한 유명한 문구입니다.

 

여기서 본질은 예수의 복음일 것이며 비본질의 자유와 모든 것에 사랑으로라는 이 자세를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며, 또한 이것을 전할 때에 이것이 비로소 우리를 해방시키기도하며, 화평케하는,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Posted by creator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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