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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의 정의

임의의 실수 a와 양의 정수 n에 대하여(a를 n번 곱한 것)을 a의 n제곱이라 한다.

에서 a를 거듭제곱의 밑, n은 거듭제곱의 지수라 한다.



지수의 성질
⓵ 

⓶ 

⓷ 

⓸  
⓹ 

⓺ 

⓻ 

⓼ 



지수함수의 정의
1이아닌 양수 a일 때, 임의의 실수 x에 대하여

의 값은 단 하나로 정해지므로,

은 함수이다.
e는 exponetial 의 약자이며 값은 2.71828.....이다.
거듭제곱의 밑이 e이면 지수함수

라고 쓴다.


지수함수의 그래프와 특징


 a>1일 때

 0<a<1일 때

 

증가

 감소



  1. 정의역  , 치역 
  2.  일 때, x값이 증가시 y값도 증가,  0<a<1일 때, x값 증가시 y는 감소
  3.  점 (0,1)을 지나고, x축(y=0)을 점근선으로 갖는다
  4. 의 그래프와   의 그레프는 y축 대칭이다.

지수함수 의 성질
  1. f(x+y)=f(x)f(y)
  2. f(x-y)=f(x)÷f(y)
  3. (단, n은 상수)  




log의 정의
a>0,  일 때, 임의의 양의 실수 N에 대하여  을 만족하는 실수 m은 오직 하나만 존재한다. 실수 m을  의 진수라고 한다



지수와 로그의 관계 
 일때,  으로 나타낼 수 있다.
e=2.7182818284590452353602874…. 을 밑으로 하는 로그를 으로 나타내며, 자연로그라고 한다.
(ex)
로그의 밑과 진수의 조건 이 정의되기 위한 조건은 밑 a는 1이 아닌 양수이고 진수 N은 양수이다. 


로그의 성질 
 일 때
① 
② 
③ 
④ 
⑤ 
⑥ 
⑦ 
⑧  k=

 


***  

로그함수의 정의
(1) 양의 실수 x에 대하여 를 대응시키는 함수  를 a를 밑으로 하는 로그함수라 한다.


(2) 지수함수 를 y=x에 대하여 대칭한 함수이다, 즉, 지수함수의 역함수이다.


(3) 지수함수의 역함수 만들기.

Step1) 를 
Step2) 위의 식을 y에 대하여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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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헌법

 

: 6:9

6: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6:10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 22:34~40

22: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22: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22: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 13:34-35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얼마전 cbs에에서 신천지에 빠진 사람들 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하여 논란이 되었습니다.

물론 사이비가 괜히 사이비가 아닌만큼 신천지 측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반론을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방송에 나온 부분은 소수의 경우이며, 오히려 개종교육이라며 신천지 신차를 개신교 측에서 잡아가 감금하는 사태 또한 있다는 말이였습니다.

예전부터 뉴스를 보면 몇몇 과격한 종교인들이나, 또는 집단성으로 문제가 일어나는 기사들이 간간히 일어나 왔습니다. 때로는 사명이라며 국보급 사찰에 찾아가 훼손을 하기도 하는 경우가 있고,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간간히 정도가 지나쳐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거나 공해라고 할만큼 과격하게 전도를 하는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쉽게 볼수 있는 모습뿐 아니라 이미 역사만을 살펴보아도 종교에 대한 생각 차이로 인한 과오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슬람과 기독교 간에도 십자군 전쟁이 있었으며, , 구교 간에도 신의 심판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죽이는 일들이 자행되던 때도 있었습니다. 또한 국 내외 만 봐도 각 종파끼리 이단심판을 하기도 했으며, 종교의 미명하에 인륜을 저버리는 일 또한 많이 자행되어왔습니다.

물론 현대에 있어서는 이러한 일까지는 일어나지 않지만 그래도 역시 곳곳에서 분쟁이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분쟁에 대해 종교에 대해 비관적인 무신론자들, 또는 분쟁중인 다른 소속의 사람들이 서로 말하는 것을 들어보자면, 그쪽의 신자들은 진짜 하나님의 말씀은 그게 아니다, 회개하면 그만이냐, 이미 구원받았으니 끝이냐, 또는 왜 생각도 없는데 강요를 하느냐 등의 이야기를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그 요지를 정리해보면, 각종 범죄의 온상이다, 이렇게 분쟁하고 싸우는 것이 종교냐, 않좋은게 많다. 따라서 거긴 맞지 않고 우리가 맞다, 라는 식의 논리를 펴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느냐? 그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각자가 다르지만 그들이 하는 말은 틀리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정리해보면 모든 종교는 맞다 다만 진리이냐가 문제일 뿐이다. 라는 결론에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이런 모습을 제 3자의 입장에서 보고있자면 무신론자들의 주장이 가장 신빙성있어 보이기까지도 합니다.

분명 성경은 우리에게 분쟁하라고 가르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일들이 어째서 일어나는 것일까요.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하고는 합니다. 예수의 가르침이 명확하지 않다, 또는 해석하기 나름이다, 자기 좋을대로 해석한다. 저쪽이 틀린 주장을 하는 것이다.

각기 그들의 입장에서 들어보면 전부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느 쪽의 말을 들어야 할까요? 과연 종교로 인한 분쟁이 없어지기는 할지라는 의문까지도 생기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분쟁은 우리가 성경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분명 성경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려다 보니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고 따라서 맥락과 상황에 따라 어느정도 그것을 현실에 풀어내는 것이 달라지는 법이죠, 그것에는 분명한 상반되는 가치 또한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도 분명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그것도 가장 우선적으로 있는 가치가 있습니다. 이 가치를 분명히 상기한다면 이런 분쟁들은 일어나서도, 일어날 수도 없습니다.

법을 집행 할 때에 보면 법간의 상하관계와 판례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떠한 단체의 규약을 보아도 규약이 있고, 시행세칙이 있습니다.

성경을 법에 비유해보자면 법을 보아도 헌법이 있고 그 아래에 민법과 형법 등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법, 또는 특수 법 들은 서로 추구하는 바가 다르기에 법간의 차이가 있을수 있는데 이것이 법에서는 분명히 상위법을 거스르지 않는 쪽으로 집행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헌법보다 아래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헌법을 어기게 되는, 본질보다 비본질에 충실하는, 우선순위를 잘못 판단하는 일이 간간히 일어나고는 합니다. 이 연장선에서 바로 분쟁,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지요.

 

따라서 오늘은 그리스도인이 지켜야할 가장 본질적인 것, 헌법이라고 말할수 있는, 하나님이 역사를 통해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셨고, 그 계획의 화룡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께서 오셔서 희생으로 완성시킨 그리스도인의 헌법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기독교 = 사랑

가장 신본적이면서도 가장 인본적인 종교인 기독교의 정수는 바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사랑 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만큼 사랑이 없는 기독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 누군가가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은 중요하고 우리의 사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게 하는 것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이 주시하는 것은 바로 그가 정말 예수의 사람인가, 주변을 돌아보는가,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는가입니다.

 

또한 율법의 본뜻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장 십계명을 살펴 보아도 사랑한다면 거짓말도 하지 않을것이고, 해치지도 않으며, 탐내지도 아니할 것이고, 이것은 오늘의 본문 마태복음 2240절에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나타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은 사랑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며 제일 또한 사랑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에서도 하나님은 곧 사랑이라고 얘기하고 있으며, 마태복음에서 하나님은 선인, 악인 상관없이 다 사랑하시고 특별히 나누시지도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이 사랑을 가장 앞서 생각한다면, 십자군 전쟁도, 이단심판도, 마녀사냥도, 또한 흔하디 흔한 분쟁들이 일어났으며,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람으로하여금 화평치 못하게 하는 과격한 행동이 일어났을까요?

그것들은 모두 이 기독교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을 우선하지 않았기에, 본질보다 비본질에 치중했기에 일어난 분쟁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분쟁, 관계라는 점에서 종교인간의 의견대립을 떠나 새새한 일상에까지도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 관계의 회복 또한도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뤄진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것을 정확히 알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이며 왜 해야 하는가?

 

과연 그렇다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은 무엇이며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은 먼저 창세부터 예수의 십자가 사건까지 과연 하나님이 우리게 무엇을 가르치기 위해 역사하셨는가를 살펴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구약은 대체로 하나님의 사랑과 징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우리는 유명한 원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됩니다.

이로인해 인간은 강포해짐을 통해 일종의 악을 향하는 지향성, 방향성, 이끌림을 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한 영향력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장 일상에서만 살펴봐도 남편이 치약을 밑에서부터 짜 쓰지 않는다고 부부싸움을 하게 되는 경우도 볼 수 있는데, 이 강포함으로 인해 타인을 제압하고 자기 자신에게 맞추려하는 악한 성향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과의 단절의 결과를 살펴보면 고통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생기게 됩니다. 이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화평이 없어짐으로 사람과의 관계가 틀어지는 것, 그리고 원하는 것을 소유하려하지만 원하는대로 되지 않는 소유의 고통입니다.

또한 에덴 동산에서 쫒겨났다 라는것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에덴을 번역하면 우리말로 기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기쁨을 잃어버리고 동산에서의 쫒겨남 즉,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사라짐으로 불안과 걱정을 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회복하기위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필요함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며, 이것의 시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기에 하나님은 구약에서 계속해서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앞서 말했듯이 구약의 율법을 통해 너희가 최소한 이것만이라도 지키며 살라며 율법의 조항을 통해서도 알려주시기도 하고, 서로간에 사랑을 못하게 하는 악을 행할때에는 징벌하심으로 나타내며, 또한 인도함으로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나타냅니다.

 

이것을 신약에 와서 예수의 희생으로 완성시키시는데, 이것으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구약의 조항을 지키는, 즉 연애로 치면 계약연애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온전한 사랑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른 것에 쉽게 비유를 하자면 마치 구약까지는 문제가 있으면 그 답을 알려주시는, 우리의 무지를 위해 1+12, 2+35라는 것을 직접 알려주시고 계셨다면, 신약에서 비로소 구약을 통해 알려주셨던 것을 기반으로 바로 이 더하기의 알고리즘, 원리 자체를 이해시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예수의 죽음으로써 나타나는데, 예수의 희생으로 하나님은 그동안 무서운, 계시되지 않은 하나님에서 다시하시는, 인간을위해 희생하시는, 인간과 함께하기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십니다.

 

이를 정리해보면 성경을 관통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시기 위해 애쓰고 인간과 함께하기위해 애쓰는 것이 기록되어있다는 점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구약을 통해 어린아이에게 일일이 알려주셨다면 신약에서 예수님의 희생, 하나님 스스로의 희생을 통해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고,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인간에게 알려주시고 또한 양보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되었기에 이 사랑이라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을 원하고, 추구하게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얼마든지 다른 종교도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고 이렇게 앎에도 우리는 사랑을 쉽게 실천하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떻게 해야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마태복음의 산상수훈, 요한복음 13~17장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바로 주님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과 소금이기에 우리 가운데의 빛, 짠맛을 잃어버리는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 우리안에 예수를 모시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은혜를 공급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앞서말한 사랑을 이해할 수는 있을지라도 그것은 분명 사람이 하는 것이기에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율법과 바리세인을 보면 알 수 있듯 보상을 바라고, 외식하고, 참았기 때문입니다. 분명 사람의 힘으로 사랑을 하면 그 끝이 좋지 않거나 어떠한 보상, 또는 목적을 바라고 하는 행위에 불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운대에 있을때에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을 할 수 있게되며, 그 부산물로써 자연스래 평안이 찾아오며 화평이 찾아오고, 성령의 열매들을 맺을 수 있게 됩니다. 진정으로 해방되고 행복에 한걸음 더 가까워진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것또한 원한다고 하여 맘대로,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하기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있는데, 요한복음 13~17장과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을 살펴보면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바로 이 사랑을 시작하게 되는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의 시작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은 바로 예수를 아는 것, 즉 우리의 죄인됨, 무력과 예수님의 희생, 사랑하심, 우리의 발을 씻으심을 고백하고 우리안에 모심으로써 시작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 자체를 고백하고 우리안에 모심으로써 이 모든 것이 시작된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예수께서는 자신의 피와 살을 먹으라 라고까지 말씀하시며 강조하십니다.

 

이렇게 되어 예수와 하나가 될 때에 우리는 포도나무가지와 같이 저절로 사랑을 공급받고,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의 9열매 또한 맺을수 있게, 맺어지게 될 것이며, 또한 화평케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이며, 진리라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랑을 온전히 이해하고 나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즉 믿음으로 시작해 사랑을 온전히 알고, 행함으로 하나님과 인간과 함께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경속 하나님의 헌법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 안에서 우리의 많은 문제, 분쟁이 해결될 것이고 평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랑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온전할 때에, 이 사랑을 깨달을 때에 비로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기에, 우리가 정말로 알기에 힘쓰고 중요하게 생각해야할 것은 사랑이 바로 본질이자 진리라는 점입니다.

이것을 본질로 놓고 생각한다면 기독교에서 종교의 미명을 쓰고 자행되어왔던 모든 실수라던지 과격한 행동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또한 때때로 필요한 어려운 결단이라던지, 체벌 또한 정말로 좋은 방향으로 결정하고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본질의 일치 비본질의 자유, 모든 것에 사랑으로. 어거스틴이 한 말이기도 하며 그리스도대학교의 교육이념이기도 한 유명한 문구입니다.

 

여기서 본질은 예수의 복음일 것이며 비본질의 자유와 모든 것에 사랑으로라는 이 자세를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며, 또한 이것을 전할 때에 이것이 비로소 우리를 해방시키기도하며, 화평케하는,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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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전서 3: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공동번역) 그것은 오늘날 여러분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침례를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침례는 몸에서 더러운 때를 벗기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양심으로 살겠다고 하느님께 서약을 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64-6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5/31 설교 세례와 믿음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이런 글을 봤습니다. “사람들이 주일 아침 11시에 교회에서 배우는 내용이 월요일 오전 11시에 하는 일과 거의 상관이 없다면 무언가 아주 잘못되어 있다.”

마크 그린이라는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하는데요, 일전에 교회 안에서 성찬식을 할 때에 이걸 먹어도 되냐고 물어보는 아이에게 세례를 받았으면 먹어도 되고 안 받았으면 먹으면 안 된다는 말을 하면서 왜 세례가 그런 기준이 되냐는 질문을 하는 것과 대답을 얼버무리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도 교회에서 이 세례는 신자가 필수로 거쳐야 할 하나의 코스가 되어있으며, 한편으로는 하나의 입교식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분명히 이렇게 세례가 관례가 된 것에는 어떠한 중요성이 존재할 것임이 분명한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저, 그냥 당연히 받아야 하는 거지, 절차지 하면서 넘어가고는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세례란 무엇이며 왜 중요한가, 세례 받은 사람의 삶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례전을 상당히 중요시 여깁니다. 한 때에는 이것으로 인해 이단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상당히 성례전이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환원신학 위에 세워진 상당히 보수적인 교단으로 이단성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성례전이 중요할까요? 그것은 먼저 히브리즘의 시간관을 알고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들 그리스도교가 직선적 시간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헬레니즘상의 시간관으로 현대의 시간관과 같이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간다는 스칼라 혹은 백터로 보는 관념입니다.

 

이와 달리 실제 히브리즘상의 시간관은 쉽게 생각해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시간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원형적 시간관이라고 하면 흔히 생각하는 동양적 사상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여기에는 분명 창조가 있고 종말이 있다는 점에서 또 이것과는 다르게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perfect Imperfect 만이 존재하는 시간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간관은 이전도 없으며 미래도 없는 오직 경험한 것 경험하지 않은 것으로 나뉘는 시간관입니다.

예를 들자면 구약의 예언과 성취를 살펴보자면 조상들이 부르짖어 이러하였으니 나 또한 부르짖나이다. 라고 하는 것과 같이 어떤 사건에 있어 내가 어떻게 할 때에 조상과 같이 하면 내가 조상과 같아지는 관념입니다.

여기서 눈여겨 볼 점은 바로 내가 어떤 것을 함으로써 조상과 같아진다.” 정확히 말하면 조상과 같은 경험을 할 것이다. 라고 믿는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구속사 또한 구약의 예언과 함께 이러한 시간관의 연장선상에 놓여있습니다.

, 오늘 우리가 한 만찬 또한 우리가 주의 만찬을 나눌 때에는 단순히 현제 만찬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성경상의 주의 식탁에 초대되어 함께 만찬을 나눈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시간관을 기반을 두어 살펴볼 때에 이 세례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오늘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새 사람이 됨, 깨끗케 됨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주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그 세례를 베푸시는 역사에 동참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볼 때에 세례는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례와 우리의 믿음과는 어떤 관계가 있으며 어떤 역할을 할까요?

 

첫 번째로 세례는 믿음의 수단이며 동시에 믿음의 시작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구원과 긴밀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먼저 믿음이 중요한 것은 부정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에베소서에 나와 있듯 우리 구원의 근거는 바로 믿음에 있으며 구원은 믿음으로 인해 오는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해당 구절을 제가 읽어드리자면 이러합니다.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즉 믿음을 수단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며 구원, 칭의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믿음과 세례를 연관 지을 때에 우리는 질문이 하나 생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바로 뒤 구절에서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며 세례 또한 행위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행위라는 것은 자랑하지 못하게하려함으로써 당시 바리세인들이 지키던 모세율법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행위는 구원 뒤에 오는 것으로, 우리의 행위를 통한 구원이 아닌 구원을 통한 선한 행위가 따라오는 것이기 때문에 행위가 구원의 근거가 되지 못함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오늘의 본문 로마서 6장에서 세례와 칭의를 연관시키고 있으며 베드로전서에서는 물은 곧 너희를 구원하는 표라고까지 이야기하고 있기에 우리는 세례가 구원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바울에 따르면 우리는 세례를 통해 예수와 함께 장사되었습니다. 이것은 수단을 나타내는 것으로 세례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하는 수단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될 때 우리는 죄에 대해 죽게 되며, 죄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악을 향한 지향성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가운대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특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베드로 전서를 근거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비로소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옴, 즉 하나님의 은혜가운데에 거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로마서 본문에 따르면 바울은 세례를 통해 우리는 씻기고, 거룩히 되며, 의롭다하심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세례 또한 믿음처럼 은혜의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례는 무엇이라고 봐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믿음의 수단으로써 믿음을 시작하게 만드는 성례라는 것이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 세례를 수단으로 믿음을 시작하고 이 믿음을 수단으로, 믿음이 근거가 되어 칭의를 받으며, 또한 삶의 변화와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론에 당연스럽게도 우리는 이러한 질문이 생기게 됩니다. 세례만 받으면 믿음이 생기고 저절로 신앙이 이뤄지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단순히 세례만 받는다고 믿음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닌 것으로 이 세례 또한 믿음으로 세례를 받을 때에 진짜 믿음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만 들을 때에는 도통 무슨 말인가 싶을 수 있습니다. 아니 세례를 받음으로 믿음을 가질 수 있는데 온전한 세례를 위해서는 또 믿음이 있어야 한다니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와 같은 말로 보일 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한 설명은 야고보서에서 나타나는데, 야고보서에 따르면 행위는 믿을 완성시키거나 완벽하게 한다고 합니다. 믿음 그 자체가 세례로 나타날 때에 이것으로써 믿음의 온전함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을 비유로 설명해 주였듯 이것 또한 비유로써 연애에 비유해 보자면 좀더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보통 일반적인 연애의 첫 번째 단계로 어떤 사람에게 호감이 있습니다. 이 상태가 바로 믿음을 시작하려하는 단계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호감으로 그 사람에게 고백을 합니다. 이것을 바로 세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고백을 통해 우리는 거절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호감을 고백을 했고 그것을 상대방이 받아주었으니 진짜로 사랑을 시작할 때입니다.

단순한 호감에서 시작하여 사귀게 되면서 그것이 연정으로 발전하며 나중에는 더 깊은 관계를 가지게 되겠지요. 이 사랑을 바로 믿음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즉 사랑을 통해 연애, 즉 관계와 소통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과 연애는 하나님과 우리의 연결됨 즉 구원을 의미하고, 이것을 통해 우리는 삶의 변화와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우리 구원의 근거는 믿음이지만 이 믿음의 수단이자 이 믿음을 시작시켜주는 것이 바로 세례라는 점에서 세례는 매우 중요한 성례이며 반드시 거쳐야할 관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세례를 통해 우리는 성경상의 인물들이 겪었던 구원과 신앙을 할 수 있게 됨으로 우리가 바라고 기다려야 할 예언과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와 있듯 이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비로소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옴, 즉 하나님의 은혜가운데에 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례를 받은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 또한 우리의 친절한 바울 선생은 염려가 많으셨는지 바로 뒤 구절에서 덧붙여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6: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6: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은혜가운데 거하게 되었으니 우리 자신을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은 바로 성화를 이야기합니다. 일전의 제 설교를 들으신 분들은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사람은 악을 향하는 일종의 지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거하지 않으면 진정으로 자유할 수가 없는 우리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한편으로는 공중권세라고까지 성경은 표현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본성 속에서 세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거함을 얻게 되었고 자유함을 가지게 되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는 주의 종으로써의 신분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선을 향하고자 했어도 선을 향할 수 없었으나 이제는 진정한 선을 향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또한 그의 구속사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한편으로 선을 지향하는 것은 세례 받은 자의 특권이면서도 의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세례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사의 사건임과 동시에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새로운 삶을 계속 간구하며 구도하는 일생에 걸친 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예수님처럼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예수님과 같아질 수는 없을지라도 그의 제자이자 하나님의 구속사 속의 일원으로써, 예수를 닮아가기에 힘쓰고 그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간구하며, 세상의 빛이자 소금으로, 주의 형상을 세상에 보이며 매일의 삶을 예배로 드리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믿음의 표현이자 성숙이며 세례받은자가 지양해야 할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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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reator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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