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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철학사를 통해 바라본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하여


이전에 대학시절 작성한 글입니다
(블로그 이전중)

중세철학사를 통해 바라본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하여
담당교수: 김희봉
신학부 윤동성 

목 차
Ⅰ. 서론

Ⅱ. 중세에 있어 신앙과 이성의 2가지 전통

  1. 플라톤 선상의 신앙주의
   가. 아우구스티누스
   나. 안셀름
  2. 아리스토텔레스 선상의 합리주의
   가. 아베로에스(이븐 루시드)
   나. 토마스 아퀴나스
  3. 소결론
Ⅲ. 현대 사조 속 신앙과 이성

  1. 신정론
  2. 현대 포스트 모더니즘
    가. 구조주의
    나. 실존주의
  3. 새로운 관점, 비판적 합리주의
Ⅳ. 결론
참고문헌

Ⅰ. 서론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세상속에 살아가는 과정에 있어, 자신이 알고있는 다른가치, 이성과의 부딫힘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신앙의 신비적 요소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환경속 사유가 다르기 때문에 상당히 필연적이라고까지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사이에서 오는 괴리에 의해 신앙이 왜곡되거나, 또는 이성을 아예 무시해버리기도 하여 세상과 신앙 단절시켜버리는 경우 또한 허다하고, 흔히 말하는 시험들림으로 신앙이 도전받기도 한다.
 또한 이성이라고 표현하지만 실질적으로 다루게 될 논제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철학과 신앙과의 관계는 이전부터 대두되어 오던 것으로 여기서는 많은 문제점, 논쟁이 발생하고 또한 이 논쟁에서 우리는 교권이 무너지기도 하는 모습을 역사속에서 쉽게 봐왔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해보면 이 신앙과 이성의 관계는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생활선상에서 시작하여 좀더 나아가 중세에서는
 그런 의미에서 이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한 고찰은 매우 의미있으며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앙과 이성의 조화, 이것은 신앙과 탐구 사이의 불가분리적 관계에 있는 신학의 중요한 과제중 하나님이 분명하다. 고전적 정의에 따르면 신학이란 fides quaerens intellectum(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으로 정의된다. 이것은 여러 변형된 형태로 알려져 왔고, 그 자체로 오래되고 풍성한 전통을 지닌다.
 이 관계는 근대적 통념 속, 통상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왔고, 근대이래. 종교와 철학이 분리되면서 이 둘은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어떤 무엇이라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그렇다면 믿는 것과 생각하는 것은 대립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 또한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생각은 믿음에 기반하고, 믿음은 생각을 통해 자라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과 생각사이 이분법적 구조를 구축하려면, 그들 사이에 Fact, 사실의 영역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 사실이 믿음과 생각사이 어떻게 이해되느냐에 따라 미 믿음과 생각사이의 태도가 정해진다. 
 그런데, 이 “사실” 이라는 것은 과학 분야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과학의 사실도 어느 정도는 믿음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물론 과학의 사실에 대한 언급은 정상과학이라는 일정한 패러다임에 근거하기 때문에 믿음에 근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전자의 흔적을 눈으로 관측할 순 없고, 진화가 사실상 입증되기보다는 합리적 해석을 위한 이론적 틀이기도 하지 않은가 라는 점에서 미루어 볼 때 다만 어느 정도의 맹목적이지는 않으며 합리적인 선에서의 믿음을 요청할 수 있다.
 이러한 과학과 달리 신앙은 반대라고 생각하여 이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믿음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이 신앙에서 신의 정의 속성 등을 연구하는 것은 합리적 추론을 통해 근거를 찾아간다고 볼 수 있다.[김선하 외 4명, 『종교와 철학 사이』, 서울: 늘봄, 1996]
 따라서 신앙“과” 이성의 관계 즉 그 “그리고”and 의 관계는 언제나 대립적인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해석의 입장, 태도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예를 들어 고대 저술가 터툴리안[Quintus S. F turtullianus, 160-220]은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라고 반문하면서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라는 말을 남겼다.
 터툴리안의 이 말은 기독교와 철학은 아무런 관련이 없고, 그래서 철학적 이성의 기반인 합리성을 철저히 배격하는 태도로 해석되어왔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죽은 자의 부활을 논증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고려한다면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주변적 상황에 대한 고려를 한다면 터툴리안이 본래 말하고자 했던 것을 온전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부활을 주장하면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에 기반하여 불합리성을 합리적 이해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1. 죽은 자의 부활이란 합리적 이해의 수준에서 불합리한 사건이고, 그 말은 상식적 합리성을 근거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2. 이 논증을 펴는 사람도 불합리성을 상식선에서 공유한다.
3. 하지만 그럼에도 이 불합리성을 끝가지 주장한다면, 이제는 오히려 그 불합리한 사건이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을 불합리하다고 여길 것을 아는데도, 그 주장을 고집한다면 거기엔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이렇게 볼 때는 터툴리안이 이성을 배격한 것이 아닌 불합리하게 여겨지는 죽은 자의 부활을 합리적으로 논증하고 있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신앙과 이성의 관계는 생각 이상으로 복잡하고 중층적인 양상을 지니고 있기에 이것을 단지 이분법적인 선택의 문제로 환원시키기에는 무리가 따른다는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둘 때에 우리는 신앙과 이성 사이에서 취할 수 있는 입장을 살펴볼 필요성이 시사된다.[김선하 외 4명, 『종교와 철학 사이』, 서울: 늘봄, 1996, 45]




Ⅱ. 중세에 있어 신앙과 이성의 2가지 전통

 보통 신학과 철학 사이에서 취할 수 있는 이 입장은 일반적으로 합리주의와 신앙주의로 대두되는데 공교롭게도 이 두 노선에 있는 학자들을 나누어 보면 철학의 두 전통적 노선과 일치하게 나뉘게 된다. 이는 그 사유방식에서 신앙주의의 진리는 이성적 추리(推理)를 극복한 신앙에 기초한다, 혹은 실재(實在)는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고, 다만 감정이나 신앙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과 플라톤의 사유 방식간의 친화성에서 오는 것이라 여겨진다. 이렇게 볼 때에 편의상 이 두 가지 전통적 입장은 여기서 이야기 하는 것에 한하여 두 가지 철학의 사유방식의 전통 선상에 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 같다.
 철학에 있어서 두 가지 전통이라 한다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 이 플라톤 선상에 있는 학자들이 신앙주의이자 다른 말로 믿음을 우선하는 전통이라 할 수 있으며, 이와 반대되는 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선상에 있는 합리주의이자, 생각을 우선하는 방식을 사유한 학자들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전통의 입장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이 둘의 관계를 살펴보려는 것이므로, 보에티우스와 같이 분리를 주장한 학자는 제외하겠다.)

 

  “Ⅱ-1” 플라톤 선상의 신앙주의(Fideism)
 신앙주의는 일반적인 사전적 정의로 종교적 진리는 이성적 추리를 극복한 신앙에 기초한다는 신학상의 입장이다. 좀더 나아가 실재는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고, 다만 감정 또는 신앙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입장이기에 합리주의적이지 않고 직관주의적인 것, 관념론적인 것 또한 이것에 포함된다. 조금은 신비주의성 경향 또한 띌 수 있다고 볼 수 있다.[철학사전편찬위원회 외 30인, 『철학사전』 (중원문화: 서울, 2012)]

    “Ⅱ-1-가“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다음의 두 가지로 정리했다.
1. 알기 위해서 믿는다.
2. 믿기 위해서 이해한다.
 먼저 알기 위해서 믿는다는 것은 그에 의하면 믿을 때 비로소 아는 것을 시작할 수 있다. 이것은 신앙이 이성보다 앞서며, 앎을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알기 위해 믿는다. 라는 방법은 두 가지 의미로 세분화 된다.
1. 믿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한다.
2. 믿음의 종국은 앎이다.
 하지만 무턱대고 아무 것이나 믿을 수는 없기에 어떤 것을 믿어야 할지에 대해 판단을 해주는 것이 바로 이성이라고 그는 말한다.
 여기서 믿기 위해 이해한다. 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이성이며, 이성의 인식 또한 계시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철저히 신의 계시 없이는 인식 또한 없으며 아는 것은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볼 때에 철저히 신앙을 앞서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전상현, “참된 진리의 탐구자 Augustinus의 신앙과 이성에 대한 연구”, (역사신학석사학위논문, 가톨릭대학대학원, 2009), 41-91]
    “Ⅱ-1-나” 안셀름
 안셀름은 앞서말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거의 그대로 물려받아 완성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으로써,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라는 문구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다.[신옥수 외1명 역, 『기독교 조직신학 개론』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2); DANIEL L. MIGLIORE, Faith seeking understanding : an introduction to Christian theology.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1, pp24-25]
그는 존재론적 신 증명으로 유명하며 스콜라 철학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된다. 그의 신 증명을 간단히 귀류법으로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신은 최고 존재자이다.
2. 최고 존재자는 이보다 더 위대한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존재자다.
3. 최고 존재자는 생각 속에서만 존재한다.(가정)
4. 최고 존재자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 생각될 수 있다.
5. 실제로 존재하는 최고 존재자는 생각 속에 존재하는 최고 존재자보다 위대하다.
6. 만일 최고 존재자가 생각 속에서만 존재한다면, 최고 존재자보다 더 위대한 최고 존재자가 생각될 수 있다.
7. 만일 최고 존재자가 생각 속에서만 존재한다면, 이보다 더 위대한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존재자보다 더 위대한 존재자가 생각될 수 있다.
8. 6,7은 불가능하다. (1,2의 공의)
9. 3은 거짓이다. (4,5,6,7의 공의)
10. 그러므로 최고 존재자는 실제로 존재한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은 안셀무스는 신존재에 있어 오로지 신에게만 유효하다는 것을 전재하고 있다. 우연적 존재와 필연적 존재를 구분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필연적인 존재가 하나님이라는 점을 논증한다. 그에 따르면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인데, 이런 존재가 자기 스스로의 존재에 의하지 않고 다른 존재에 의해 존재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모순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전재를 기반으로 그는 프로슬로기온에서 존재론적 신 증명을 주장하였고, 이 전제 속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상상할 수 없는 존재”와 부합하면서도 가우닐로, 칸트의 동전 비판을 피해간다.
 이렇게 살펴 볼 때에 신앙주의는 앞서 서론에서 언급하듯 종교적 믿음은 합리성의 시험을 거치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이다. 신앙은 오히려 신앙 외부의 합리성이 아니라, 신앙적 믿음 그 자체 안에 내적으로 근거하고 있다고 본다.[김선하 외 4명, 『종교와 철학 사이』, 서울: 늘봄, 1996, 46-47] 이 경우 20세기의 폴 틸리히는 종교의 토대로 “궁극적 관심”을 제안하는데, 종교적 믿음은 우리의 일상적 관심사가 아닌, 어떤 궁극적인 것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믿음은 합리적 근거가 있기 때문에 믿기보다, 오히려 그런 합리적 근거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믿음의 힘이 부각된다. 여기서 개인적으로 어디까지나 신앙적 요소를 깨트리지 않는다는 전제속 간단하게 수학적으로 예를 들 수 있는 “생각”을 해볼 수가 있었다. 무리수는 인간이 모르는 수다. 정확한 양을 계산할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볼 때에 라는 무리수를 인간, 우리가 살아가는 실제라고 가정하고, 기독교의 하나님 또한 라고 가정을 했을 때, 와 가 만나면, 즉 무리수와 무리수가 만나면 정수가 된다. 이렇게 볼 때에 우리 스스로가 완벽히 모든 것을 진리로써 조망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의견으로써 사실상 같은 무리수가 아닌이상은 성립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무리수를 정수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한 것이 이 방법이며, 무리수와 무리수가 만나 정수가 된다는, 인간과 그리스도가 만나 정수가 된다. 라는 이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생각을 한번 제시해보고 싶었다.)이 신앙주의적 입장에서는 조금 더 이상적이지 않을까 라는 의견이다.
 이 신앙주의에서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올바른가, 잘못된 믿음은 아닌가? 라는 것에 대한 검토가 없는 신앙은 믿음의 도약이며 그것은 신앙적 맹목주의를 조장하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믿음의 반대말은 불신앙 또는 비믿음이 아닌 몽매한 신앙이다. 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즉 무작정 신앙을 가지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주의라 하더라도 무작정 믿음을 전제하지는 않는다고 할 수 있다.

  “Ⅱ-2” 아리스토텔레스 선상의 합리주의
 아리스토텔레스–아베로에스–아퀴나스의 노선에 있는 합리주의적 신앙의 입장의 경우 믿음이란 합리성에 기반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때 이 합리성이 엄격한 증거에 기반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종교에 부정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왜냐하면 종교적 믿음은 증거에 기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c 영국의 수학자 클리포드(W.K. Clifford는 “불충분한 증거를 가지고서 어떤 것을 믿는다는 것은 어느 경우이건 그리고 누구이건 언제나 잘못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그가 종교는 이러한 엄격한 증거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김선하 외 4명, 『종교와 철학 사이』, 서울: 늘봄, 1996, 46-47] 하지만 이 전통선상에 있는 다른 학자들은 의견이 조금 다르다.

 
    “Ⅱ-2-가“ 아베로에스 (이븐 루시드)
 아베로에스는 이슬람 신학자로 신학과 철학은 서로 양립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철학을 통해 온전한 계시가 가능하며, 종교는 완전한 철학에 의존한다는 입장으로 철학은 진리를 인식하는 방법에 있어 종교보다 우위에 있고 완벽하다고 보았던 학자다.
 이러한 합리주의 노선상의 학자이지만 이슬람의 꾸란을 진리로 생각했던 학자이기에 기독교 신앙과는 관계가 없을 것 같지만, 그가 대두 돼야 할 진짜 이유는 바로 성경을 진리로 생각했던 아베로에스의 추종자들이 있기 때문인데, 파리 대학 인문학부 교수들 가운데 아베로에스를 철학의 스승으로 존경, 그의 합리주의 노선을 쫒아가려 했던 라틴 아베로에스 주의자들이다.[이재경, “중세 이슬람 철학의 합리주의 흐름”, 『철학논총』 제33집(2003 여름), 295-315] 그들은 아베로에스의 합리주의에서 좀 더 나아가 극단적으로 이중진리론을 주장하게 된다. 이 이중진리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학자로는 대표적으로 시제 브라방(시제루스)[Sigerus, 1235-1282]가 있으며 “철학을 철학적 틀 안에서 그리고 종교를 종교적 틀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아베로에스의 해석학 명제에서 출발하여, 철학, 이성을 따라 진리인 것이 신학, 신앙에 의해 반대인 것과 같이 진리로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물론 이에는 철학과 이성을 기독교회의 권력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라고도 생각된다.]
 예를 들자면 세계는 창조되었고, 시작이 있으며 무로부터의 창조를 의심할 수 없다는 성경의 진리와 철학적으로 운동의 절대적인 시작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무로부터의 창조가 불가능하며 세계의 영원성을 논증하는 것이 동시에 서로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양립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기독교 교리와 충돌을 일으켜, 아퀴나스를 비롯한 여러 신학자들에게 비판을 받고 단죄의 대상이 되었다.[서병창, “신앙과 이성의 관계와 이중진리론 –시제와 토마스를 중심으로-”, (연구논문, 연세대학교, 2010)]

    “Ⅱ-2-나”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의 경우 인간은 자연이성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진리들의 고유한 내적 근거들에까지 접근할 수 있고, 오직 신에 의한 계시를 통해 그것들을 참된 것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중적 논증 방식을 채용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사유했는데, 이 진리의 이중적 방식은 이성과 신앙을 대립구도에서 보고 양자를 분리하는 입장이 아닌, “은총이 자연을 전제하듯 신앙이 자연적 인식을 전제한다." 라는 입장으로, 자연이성이 접근할 수 있는 인식과 계시내용을 수학하는 믿음(신앙)의 구분을 명확히 그었다.
 이러한 맥락 속 그는 초자연적 계시에 대한 동의로써 신앙의 이성성(합리성, Vernunftigkeit)을 한편으론 철학적 신 존재증명과 부정논증(계시를 부인하는 이성의 주장이 결국 잘못임을 증명하는 논증)을 통해, 다른 한편으론 계시의 사실과 성경의 신적 권위를 증명해주는 기적들(miracula)과 예언들(prophetiae)을 통해 논증하였다.[김승욱, “신앙의 합리적 자기이해의 두 가지 모델  :  안셀무스와 토마스” 『누리와 말씀』 제23권(2008), 253-274]
 결론적으로 그는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서 신앙과 이성을 매개로 “양자의 통일성”을 탐구하고자 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경우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최대한 이룩했다고 평가받는 사람으로서. 합리주의 서두에 언급한 클리포드와 다르게 기독교 신앙이 합리주의의 합리적 기준에 부응할 수 있다고 보았다.[김선하 외 4명, 『종교와 철학 사이』, 서울: 늘봄, 1996, 46-47]
 이 경우 엄격한 증거보다는 합리적 기준을 합리성의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합리성의 기준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따라 종교에 대한 태도는 긍정일수도 부정적일수도 있었다. 즉 케른(W. Kern)의 지적대로 신앙의 내면적 논증근거들이 아닌 계시의 신뢰성을 증명하는 근거들이 관심사의 전면에 놓여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김승욱, “신앙의 합리적 자기이해의 두 가지 모델  :  안셀무스와 토마스” 『누리와 말씀』 제23권(2008), 253-274]
 이렇게 볼 때 합리주의라 하여 언제나 종교에 부정적인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이러한 합리주의적 태도가 종교의 입장에 건전하냐는 것이다. 신앙이 합리적으로 예측가능하고 계산 가능한 것의 지평을 넘어 있다고 생각하면, 믿음이 합리성에 근거해야 한다는 주장은 종교를 이성적 합리성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종교에 건전한 태도가 아니며 더 나아가 우리가 사유하는 모든 것들이 그렇게 합리적인 이성을 기반으로 이성적인 증거를 토대로 구축되었는가? 라는 것도 문제가 된다.
 우리가 세계를 사유하는 많은 것들이 합리적 고찰과 증거를 기반으로만 구성되진 않았기 때문이다. 좀 더 나아가 이성은 합리적인가 라는 질문을 할 때에는 우리의 지식이 권력 작용과 공모관계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권력관계를 기반으로 구축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경우 이성은 궁극적 의미로 지적일 수는 있어도 합리적일 수는 없다.(상대적으로 합리적이라는 것.)[김선하 외 4명, 『종교와 철학 사이』, 서울: 늘봄, 1996, 46-47]

  “Ⅱ-3” 중세사상사에서의 소결론
 지금까지 살펴볼 때에는 먼저 신앙과 이성을 분리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라는 소결론이 나온다.
 여기에 대한 개인적인 필자의 견해는 앞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철학과 신앙이 서로 상반되는 결과를 내 놓을 때는 진리는 하나이나 둘 중 하나가 틀렸다는 아베로에스의 주장을 지지하고 싶다(이것은 한편으로 그가 이중진리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대변한다).
 (화이트 보드에 써서 설명할것!) 살펴보자면 수학의 프렉탈의 시에르키핀스키에 대해 다른 접근으로써 이해가 쉬울 것 같다.

 
  그림과 같이 정삼각형을 그려보자. 그리고 그 삼각형 각 변의 중심을 이어보라 삼각형 4개로 나누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처음 그린 삼각형의 윗변 두 개의 길이와 한쪽 변에서 중앙까지 왔다가 다른 변까지 지그재그로 이어진 4개의 변은 길이가 같다는 것을 알 것이다, 거기서 또 삼각형을 나누어보라, 계속해서 극한까지 나누다 보면 언젠가는 밑의 한 변과 같아진다. 라는 가설을 기하학적으로 세워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각 변의 길이가 1일때 1=2라는 결론이 나오고 현제까지의 수학 체계가 무너진다.
 물론 실제 프렉탈의 시에르키펀스키 삼각형이 의미하고 있는 의도는 차원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비교할 수 없이 심오하지만 다행이도 이것에 대한 문제는 수학적으로 정립이 가능하다.

1. n번 분할한 삼각형의 한변 길이는 






이다.

2. n번 분할한 삼각형의 측정해야 할 변의 수는 


3. 따라서 n번째 삼각형의 측정해야 할 길이는 총  

  이기에.

4.   

라는결론이 나온다.

5. 이것은 무한급수를 대입할 때에 

이라고 생각하여 범해지는 오류인데, 4번의 식에서 2라는 값은 n에 대한 식이 아닌 변의 길이에 대한식이기에, 결론적으로 

가 된다.

 즉 하나의 진리에 극한까지 나누면 직선이 될 수 있다. 라는 다른 의견은 수렴할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그것의 과정상 공리가 잘못된 우를 범하고 있기 때문에, “공리에 의해 1=2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공리를 통해 제시할 수 있는, 어느 한쪽이 진리라는 것 또한 어디까지나 “과정” 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을 때의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현대에 와서는 이러한 문제가 더욱 복잡해져버렸다. 그것은 바로 과정이라는 것이 깨져버린 것인데, 이 이야기는 현대에 아우슈비츠 이후 재조명된, 어떻게 보면 개신교가 가장 어려워하고 빈약한 결론밖에 못 내리고 있는 신정론을 살펴보고 함께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다.

Ⅲ. 현대 사조 속 신앙과 이성
 앞서 말하듯 현대에 와서는 이 공리라는 것이 깨지게 되었고 따라서 결과를 두고 어떤 것을 논의하고 문제제기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서 자연스래 부상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신정론이다. 이 신정론은 2차 대전 이후 부상되긴 했지만 이전부터 이성적으로 상당히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기독교에 있어 난제로 여겨지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신정론 또한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생각함에 있어 숙지하고 넘어갈 중요성이 시사된다.

 
    “Ⅲ-1” 신정론
 신정론은 바로 신은 정의로운가를 논하는 학문이다. 한편으로는 신의 본질과 능력을 논하는 학문이기에 신학에서 가장 기본적인 학문이기도 하면서 실상적으로 우리의 삶과도 정말 가까이 닿아있는 부분이다.
 당장 예를 들어도 인간의 고통이라는 것을 들 수 있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작가들이 제시하는 논제이기도 하다(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 조프가, 이문열 인간의 아들, 권터그라스의 게걸음으로 가다 등). 과연 신이 존재한다면 왜 악이 존재하는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참상은 어째서 벌어지는가? 어째서 그것이 극복되지 않는가? 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이 문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전지한 존재자는 악을 어떻게 제거하는지 안다. 전능한 존재자는 악을 제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2. 완전히 선한 존재자는 악을 제거하기를 원하거나 악을 제거할 의무를 지닌다. 또한 선한 신은 악의 원인일 수 없다.
3. 악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세상에는 악이 존재한다.
4. 따라서 신은 선하지 않거나 전능하지 않다.
 이에 몇몇 학자들의 의견들을 살펴보면 먼저 “플라팅가”는 하나의 자유에 관한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이것은 현재의 세계가 모든 가능성중 최선이며, 신은 자유로운 피조물을 창조했으나 그들 중 일부가 옳은 길에서 벗어나면서 이것이 악의 근원이 되었고 이 사실로 인해 그의 전능성과 선이 훼손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면 그는 단지 도덕적 선의 가능성을 발휘함으로써 도덕적 악의 발생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신은 전능하지만 도덕적 선은 가지되 악은 가지고 있지 않는 세계를 창조하는 것은 그의 능력 밖이다 라는 제3의 명제가 발견된다.
 그렇다고 그는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스스로 무능 무지했다 라고 하기에는 그는 선하고, 악을 제거하기를 원한다는 명제에 어긋난다. 여기에 대해 절대 주권성으로 2번 명제를 피해가려고 한다 하여도 실상 부족하고 와 닿지 않는 답변일 것이다. 다른 학자들의 의견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선이 결여된 상태가 악이라고 이야기 한다. 마치 차가움이라는 것은 본질상 존재하지 않고 열에너지가 상대적으로 적은 상태임을 가리키고 어두움이라는 것이 빛의 부재로 인하여 나타나는 것처럼 그에 의하면 악의 원인은 선의 결핍이다.
 칸트는 인간이 본성상 약하며, 약한 심정에서 악이 생겨났다고 본다 하지만 선한 소질이 악한 성향의 원인이 된다는 것은 칸트에게 말이 되지 않는다, (칸트는 여기서 형이상학을 마주하면 이성은 그 한계에 부딫친다라는 말을 남긴다.) 따라서 이것에도 종교적 표상에서 마귀의 유혹으로 표현되는 어떤 악한 것이 필요하다. 이것을 요나스라는 학자는 합법적 준칙을 실현하기 위한 사유의 과정에서 비합법적 행위의 가능성을 생각한 것을 알게 된다는 것으로 자신에게 자신이 유혹되어 악한 성향이 약함으로 인하여 발동되었다고 본다.
 칼뱅은 이것에 하나님은 악독함을 창조치 않았지만 사탄의 대적을 허락하였고, 사탄에게서 악이 생겨났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이것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이 타락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라고 말한다.
 물론 이외에도 많은 해석과 논쟁이 있지만 그것에는 어떠한 공통적 가정이 존재한다. 그것은 신은 더 중요한 선에 필요하지 않은 어떠한 악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실질적인 인간의 고통, 감정과 닿아있다는 점에서 삶속에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이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점을 좀 더 확실히 해 준다.


    “Ⅲ-2" 현대 포스트모더니즘
 그런데 현대에 와서 이 문제는 더욱 더 복잡해졌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유방식을 유지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잘 알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이다. 과정과 다른 결과가 나오면 그 과정은 틀린 것이 되는데, 이런 일이 생김에 따라 과정에 대한 믿음이 약해졌다.
 이것은 역학에서 시작되었는데, 바로 잘 알고 있는 양자역학이다. 기본적으로 중세를 거쳐, 뉴턴, 코페니우스 등을 거쳐서 탄생된 것이 바로 고전 역학, 물리학이다. 이것을 종교는 이러한 정교한 법칙을 설계한 것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이용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배격하다가 이렇게 이용했다는 면에서, 이것은 앞서 말한 권력이 합리성을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것으로 현대에는 E=mc^2라는 기본적인 힘, 에너지와 중력장에 대한 이해도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상대성이론의 창시자인 아인슈타인도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 바로 양자 역학이다. 양자역학을 표현하는 유명한 이론 중에 물리학 개그 소제로도 많이 알려진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있다. 이것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어떤 고양이가 밀폐된 상자 안에 갇혀 있다. 상자 안에는 1시간에 2분의 1 확률로 1개 분해되는 알파입자 가속기가 있고 청산가리 통이 들어 있다. 만약 알파입자가 방출되어 청산가리 통의 센서가 감지하면 청산가리 통은 깨지고 고양이는 죽고 만다. 1시간 후 과연 고양이는 죽었을까 살았을까? 이것은 관측하는 순간 결정이 된다.
 쉽게 말하면 살아있는 고양이와 죽은 고양이를 서술하는 파동함수를 도입 시 50%는 죽어있고 50%는 살아있는 희한한 상태를 만들어내며, 관측자의 관측에 의해 상태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즉, 현상학에 있어 어떤 법칙을 통한 예측이 소용이 없어지고 결과만이 남는다는 것이다. 분명히 계산상에는 a의 위치에 있어야 할 입자가 b에 가있고 몇 번을 실험을 반복해도 계산과는 다른 결과가 나온다.
이것은 현대철학의 사조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자연의 실제가 안정된 형상이나 법칙성으로 이해되기보다 역동적이고, 복잡하고, 기묘한 그 무엇으로 이해됨에 따라 법칙과 공리라는 것이 깨지게 되면서 현실적으로 유효한 것이 아니라, 유효한 것이 진리이게 되는 결과를 불러왔다. 여기서는 기존의 모든 사유법칙도 통하지가 않는다. 다른 결과가 나오면 그 추론과 사유는 틀린 것이 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바로 핵심을 증거, 결과에 놓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라는 것이다. 과연 애초에 예수가 기적을 일으키지 못했다면 사람들이 반응했을까? 아니다. “기적” 이라는 것은 애초에 공리적으로 맞지 않는 결과, 가능성 높은 예측이 틀린게 되었을 때 나오는 말이다. 즉 합리적이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주목했고 반응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믿음은 합리적인 근거가 있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합리적인 근거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믿음의 힘이 부각된다는 신앙주의적 입장이 조금 더 힘을 얻는다고 조심스레 바라볼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이런 공리가 깨지게 되는 현상들이 방아쇠를 당기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 합리주의적이고, 기계화된 구조를 가진 사조, “모던“에 대한 일종의 반발로써 나타난 것이 바로 포스트 모더니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앞서 우리는 구조주의와 실존주의에 대해 알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다음 장에서 설명할 비판적 합리주의가 현대 포스트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이 두가지 사조 속에서도 상당히 이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Ⅲ-2-가” 실존주의
 실존주의는 사전적 정의를 따를 때에 “실존은 본질에 선행” 한다는 것이다. 실존에 의해 그 관계성을 맺게 되고 본질이 드러난다는 것, 이것은 주체성이 곧 진리다. 라는 점에서 본체론적 신증명과 상당히 유사성을 띄고 있다. 사실상 신앙주의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나라는 것의 존재가 우선된다는 점에서 데카르트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신앙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을 받아들이는 것이어서 그로 인해 생기는 "불확실성"을 불가피하게 갖고있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배척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용기를 지닐 때, 우리는 신앙의 역동성(dynamics of faith)을 구현할 수 있다. 즉, "신앙"은, 모험이 불러오는 불확실성 때문에 생겨나는 의심을 내적인 요소로 갖는 "궁극적 관심"이다.”
 이것은 잘 알고있는 신학자, 틸리히의 말이다. 틸리히는 불트만의 실존주의 신학을 계승한 신학자로써, 결론적으로 신앙을 “궁극적 관심”이라고 결론짓는다. 또한 불확실성이라는 단어에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이것이 신앙주의 연장선상에 놓여있음을 시사할 수 있다.

    “Ⅲ-2-나” 구조주의
 구조주의는 모더니즘을 비판하면서도 전통철학의 합리주의를 이어받은 사고, 방법론을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 구조주의는 합리주의를 수용하고는 있지만 근대적 합리주의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성중심, 서구중심, 그리고 인본주의적인 사고를 벗어나서 인간이 무엇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환경 자체가 인간 주체를 변형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물의 의미는 구조 안에서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에 따라 규정된다. 즉 본질이 정해진 것이 아닌, 구조에 의해 그 사물의 의미와 본질이 정해진다는 사상으로써 앞서 말한, 실존주의와는 다르게 상당히 구체성을 중시하면서도 그 자체로써는 어떠한 본질을 규정하기에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다.
   
 언급한 두가지 사조는 편향될 수도 있지만 실재(實在)는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고, 다만 감정이나 신앙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본 논고상에서는 신앙주의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살펴볼 때에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신앙주의도 무작정 이 믿음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올바른가, 잘못된 믿음은 아닌가? 라는 물음에 대한 검토가 없는 맹목적인, 몽매한 신앙을 경계한다. 역사 속에서 이 몽매한 신앙이 사람들을 비참한 결과로 인도한 경우는 충분히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주의에 의하면 믿음은 생각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믿음이 맹목적이기를 바라고 그렇게 조작하는 악한 행위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 믿음이 온전한 믿음이기 위해서는 바로 이 맹목적 믿음을 경계해야한다.
 즉, 신앙이 근본적으로 합리적 추론에 근거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형성된 믿음의 행위들에 대한 합리적 검토는 신앙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다 온전한 믿음을 가지는데 유용한 작업이라는 것이다.[김선하 외 4명, 『종교와 철학 사이』, 서울: 늘봄, 1996, 49]

   “Ⅲ-3” 비판적 합리주의
 이러한 관점에서 사람들은 “비판적 합리주의”를 주장한다. 이것은 “종교적 믿음들에 대한 결정적인 증명이 불가능하더라도 그러한 믿음 체계들이 합리적으로 비판되고 평가될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고 보는 관점”[라이엔바하 외, 『종교철학』, 76]이다.
 여기서 비판적 이라는 말은 두 가지 뜻을 함의한다.
1. 종교적 믿음을 단번에 참이라고 믿고 결단하기 보다는, 그 신앙 주장들에 대한 비판적 검토 작업들이 필요하다.
2. 이 “비판적” 이라는 말은 우리의 “이성”의 능력에 대해서도 비판적일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순수하고 객관적인 합리성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인데, 우리의 추론 방식과 사유 방식은 언제나 그 시대 지식 권력의 영향력 하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추구하는 합리성이 진정한 합리성인지를 물을 수 있을 때, 그 합리성은 종교의 맹목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따라서 이성을 결여한 신앙은 맹목적으로 나아가기 쉽고, 신앙을 결여한 이성은 지능적 계산의 약삭빠른 게임에 불과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신앙과 이성 모두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견제할 때” 건전성을 확보할 수 있다. 신앙과 이성은 양자택일의 이분법적 문제가 아니며, 신앙과 이성은 “비판적 동무관계”를 견지하며 함께 같은 방향을 보며 삶이라는 길을 걸어가는 관계이다. “동무”는 오랫동안 지내왔기에 익숙해져 습관이 되어버린 관계가 아닌 한 친구가 길로부터 이탈을 하거나 뒤처지면 함께 쉬던지 이끌고 가야하는 관계를 말한다.
 만약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서 선택의 문제가 발생한다면 이 둘 중 하나가 이탈을 하거나 뒤쳐진 경우일 것이다. 양자 간의 어느 한쪽만을 선택하기를 요구하거나 받는 것은 근대이래. 정착된 잘못된 이분법적 구조에 우리의 사유가 길들여진 탓일 것이다.[김선하 외 4명, 『종교와 철학 사이』, 서울: 늘봄, 1996, 47-50]



Ⅳ. 결론
 결론적으로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서 어떠한 입장에서 어떤 답을 찾을지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삶 속에서 도움이 되는 방향을 택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답을 내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생각을 해 보자면,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살아간다. 또한 인간의 모든 감정, 느낌은 분명 관계로부터 기인하고 있다.
 이렇게 살펴 볼 때에 신앙을 가짐으로써 조금은 불확실 하지만 있을수도 있는 신과의 관계성을 가지는 것이 본인의 삶에 좀더 행복으로써 다가온다면 신앙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그것이 본인의 삶에 마이너스 요소가 된다면 그에 맞게 신앙을 가지지 않으면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사유하는 과정에 있어서 우리는 비판적 합리주의의 태도로써 완벽할 수는 없지만, 최대한 객관성을 가지기 위해 “노력” 해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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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reator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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